역대 족보발간

일가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웃음소리가 창밖까지 번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족보에 대한 기본상식


(1) 족보(族譜)의 의의


족보는 보첩(譜牒)이라고도 하며,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같은 혈족의 원류(源流)를 밝히고 그 혈통을 서로가 존경하며 가계(家系)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가문의 역사책이다. 이 책을 보첩(譜牒), 종보((宗譜), 가보(家譜), 세보(世譜) 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譜)는 세계도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일족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해 선조 중 특히 충(忠) 효(孝) 절(節), 의(義)가 세상에 나타난 인물을 들어서 그 사적(事蹟)이나 공적(功績)을 수록하며, 선조 가운데 국가사회에 훌륭한 공적을 남겨 세상의 숭앙을 받는 명망있는 인물에 대하여는 유업(遺業)을 찬양하고 스스로 그 후예(後裔)임에 긍지를 갖게 됨으로 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
족보는 개인의 권위보다도 종중을 중심으로 후손들로 하여금 원근을 불문하고 화합을 일으키는 단결력을 함양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2) 족보의 목적


대체로 족보는 종족(宗族)의 단결을 도모하고 동족 내부의 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으며 그 뜻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족인(族人)은 모두 한 시조에서 이어젔다는 족인의석(族人意識)을 명확히 하고 종족간에 연결된 체제에 순응케 한다.
②. 족인 각자는 깊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혈연(血緣)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높인다.
③. 선조들이 자손을 아끼던 마음을 생각하여 족인 서로 간에 상부상조 하게 한다. 선조의 덕업(德業)을 높이고 추모하여 종족의 사회적 성망(聲望)을 높여 선조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족인의 역사적 자각을 환기시킨다.
④. 종족의 교화(敎化)를 도모하여 구성체제(構成體制)를 확립시킨다.

(3) 족보의 유래


처음 왕실의 계보(系譜)인 왕대실록(王代實錄) 또는 선원록(璿源錄)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족보는 고려 때부터 필사(筆寫)로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11대 문종(1046-1083) 때 성씨 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보책을 비치하고 과거(科學)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을 밝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1522-1566년(조선 중종16-명종21)에 문화류씨의 가정보(家靖譜)라 하나,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족보 가운데 문헌(文獻)적으로 오래된 것으로 신뢰되는 것은 성화(成化) 12년(1476)에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병신보(成化丙申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족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필사(筆寫)로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이 만들어 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4) 족보의 종류


족보는 대동보(大同調), 족보(族譜), 세보(世譜), 파보(派譜), 가승보(家乘譜), 계보(系譜), 만성보(萬姓譜) 등이 있다.

①. 대동보(大同譜) : 같은 시조(始祖)밑의 중시조(中始祖)마다 각각 다른 본관(本貫)을 가지고 있는 씨족간(氏族間)의 관계를 모두 수록하여 종합편찬(綜合編纂)된 족보이다. 즉 본관이 각기 다르나 시조가 같은 종족이 함께 통합해 만든 책이다.
②. 세보(世譜) : 본관(本貫)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로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가계의 연속을 나타내는 책이다.
③. 파보(派諸) :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속만의 이름, 휘(諱), 자(字)와 사적(史蹟)을 수록한 보책(譜冊)이다.
④. 가승보(家乘譜) :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 존비속(尊卑屬)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文獻) 이다.
⑤. 계보(系譜) :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로서 한 씨족 전제가 수록되었거나 어느 한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⑥. 만성보(萬姓讀)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한 책으로 각 성씨 족보의 사전(辭典) 구실을 하는 책이다.

(5) 족보의 간행과정


족보를 간행하고자 계획을 세우면 먼저 종회에서 족보 간행을 의결한 후 회의결과를 각 파에 알리고 곧 종회를 열어 족보편찬위원회(族譜編纂委員會)를 구성하여 일가들의 분포사항(分布事項)을 파악하고 편집에 관한 모든 사항을 논의 결정하여 각 파 지방조직을 통해 단자(單子)를 받아 심의 검토하여 인쇄소에 의뢰하여 간행한다.

(6) 단자(單子)


①. 자료(資料) : 단자내용(선대와의 관계와 본인에 관련된 자료 등)의 의문시는 호적등본 또는 가승보(家乘譜) 등을 참고하고, 직위 의문시는 원본 등을 참고 한다.
②. 명자(名字) : 이름자는 한자(漢字)에 한글(세로로)을 부기(附記) 한다.
③. 자와 아호(字와 雅號) : 자(字)가 있는 사람은 기재하고 호는 유고(遺稿)와 문집(文集) 발행이 있는 자(者)에 한하여 기재한다(생존자는 제외한다).
④. 생졸(生卒) : 생졸 년월일에서 서기년을 먼저 기재하고 년간지(年下支), 생월, 생일은 음력(陰歷)으로 기재한다.
⑤. 직위(職位) : 망자(亡者)의 직위는 구보(舊譜)대로 하고 생자(生者)의 직위는 다음과 같고 퇴직자는 직위 앞에 역(歷) 자를 함께 쓴다.
가. 공무원은 사무관(事務官) 이상.
나. 군인은 영관급(領官級) 이상.
다. 고시합격자는 사법, 행정, 외무, 기술(司法, 行政, 外務, 技術) 등.
라. 교육자는 조교수(助敎授) 이상, 초중고는 교장 이상.
마. 선출직인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통대의원(統代議員), 교육의원(敎育議員) 등
바. 기업인(企業人)은 상장기업대표(上場企業代表) 사장. 국영기업대표(國營企業代表)
⑥. 학위(學位)는 박사 이상
⑦. 상훈(賞勳)은 국가상훈록에 등재된 상훈에 한함.
⑧. 배위(配位)는 생자와 사망자 같이 배(配)로 통일하고, 관향, 성씨, 생졸 연월일, 부, 조, 증조, 외조명과 현조는 시호 00後로 기재하고 배위가 두분일 때는 육(育) O남O여 라고 적는다.
⑨. 미혼 딸은 아들 이름의 다음에 기재하되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재하고, 출가녀는 남편의 성명, 관향, 부친, 아들 이름, 현조(顯祖) 00후라고 기입, 사위의 성명 앞에 딸의 이름을 먼저 적을 수도 있다.
⑩. 계보불명자(系譜不明者)의 경우 족인은 위원장단 및 고문단 회의에서 심의 후에 수단할 수 있다.
⑪. 망자의 묘소는 지명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좌향(坐向)을 적고, 묘비가 있으면 비문 찬자(撰者)를 쓰고 유상석(有床石) 또는 유석물(有石物)이라고 적는다.
⑫. 후손이 없을 경우에는 무후(無後) 2자를 쓴다.
⑬. 연도표시(年度表示)는 예로서 1901을 一九O一로 표시한다.
⑭. 월일표시(月日表示)는 10은 十으로 12는 十二로 표시한다.

(7) 족보를 보는 방법과 기본상식


족보를 보면 서문이 먼저 나오는데 이는 머릿말로 자랑스러운 가문과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고취시키고 족보간행의 중요성 및 긴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보통 간행연도를 붙여 (OO譜)라 이름을 붙인다(예로 辛巳譜). 본문에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같은 칸으로하여 한 면당 6~9간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이름(名) 자(字)가 나오고, 다음에 출생(生)과 사망(卒) 연도가 표시된다. 7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하면 향년, 70세가 넘어 사망하면 수(壽)라 옆줄에 기록한다. 관직과 시호(諡號)가 기록되고, 남자의 배위와 여자의 배우자를 기록하고, 양가의 祖와, 父의 본관, 이름, 관직 등을 기록하고, 분묘(墳墓)와 석물(石物)을 기록하고, 양자(養子) 갔을 때는 출계(出系)로, 양자를 들이는 쪽은 계자(系子)라 하고 생부(生父)를 기록한다.

2. 수보전말(修譜顚末)


고려 제9대 덕종(1031-1034)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신 우리의 시조공 휘 황(璜)께서 정착하신 후 대대로 대소 관작(官爵)을 제수 받거나 군(君)에 훈봉되는 등 문중을 번창시켜오다가 10世를 지나고 부터는 더욱 번성하였으므로 12世 사암공 휘 지(墀)께서 1476년 정월에 고성이씨 세계(世系)를 체계화시킨 용헌자녀도(容軒子女圖)가 수록되어 있는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우리 가문의 최초의 족보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족보는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 1476년)와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 1562년) 보다 앞선 족보임을 알려둔다.
선조때(1580년) 둔재공파 후손인 야로당(野路堂, 휘 淳)께서 편찬한 철령초보(鐵嶺初譜)와 선조 30년 (1597, 정유)에 은암공파 후손인 송암공(松嚴公, 휘 魯)께서 편찬한 사성강목(四姓綱目)은 두 번째 만들어진 족보이다.
숙종 45년(1719)에 이희안(李希顔)이 용헌자년도와 분묘위치도, 세계도, 용헌팔고조도, 수산공(繡山公 휘 滂)의 자손분포도 등을 합하여 철성경람도로 편찬 하였다.
영조 2년(1726)에 봉사(奉事) 휘 섭(燮)께서 편찬하신 4권 1책의 병오초보(丙午草讀)는 삭주군 삭주면 탕노동 후손 휘 양보(陽甫) 가문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병자년에 논산군 두마면 용동의 후손 휘 인구(人榘) 가문으로 옮겨 보관하던 것을 손자 錫煥씨가 2008년에 복사 합본하여 그 수십 권을 전국에 공급하였다.
그 후로 계유보(癸酉譜 1753년)에 이어 정묘보(丁卯譜 1807년), 갑술보(甲戌譜 1874년), 을묘보(乙卯譜 1915년), 경진보(庚辰譜 1940년), 병진보(丙辰譜 1976년), 신사보(辛巳譜 2001년) 등 8차례 속보를 발간하였다.
위의 대동보 이외에 각 파의 파보(派譜), 각 가문의 가승보(家乘譜) 등의 발간이 많았다.

3. 철성연방집


12世 사암공 휘 지(墀)께서 1476년 정월에 고성이씨 세계(世系)를 체계화시켰으며, 청파공(靑坡公 휘 陸)께서 발간한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에 수록되어 있는 용헌자녀도(容軒子女圖)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이다.
서문은 청파공과 달성 서거정공이 쓰쎴으며 청파공의 서문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조부이신 용헌공의 잡영(雜詠, 여러 가지 사물이나 계절의 느낌을 시가詩歌로 지어 읊은 것)이 무릇 231수이고 증조이신 평재공(10世)의 잡영이 무릇 40수로 시는 모두 271수이다.
평재공은 15세에 급제하였으며 문장과 절행이 당시의 명현이었던 목은 이색(李穡), 유항 한수(韓脩), 곡성 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망형의 벗(忘形之友, 자기 자신을 잊을 정도로 친한 친구)의 벗이 되었고 벼슬은 밀직부사에 이르렀으니 평생 행사한 자취는 목은선생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용헌공은 18세에 급제하였고 국내외에 이력을 드날렸으며 태종대왕께서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로 대우하시어 물과 물고기처럼 뗄 수 없는 친한 사이였다. 공훈은 사적에 있고 이름은 역사에 올랐으며 도의를 논하고 나라 일을 보살피는 여가에 흥취에 따라 읊은 시가 상자에 가득하였다. 춘정 변공이 당시 문병(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양 추양(秋陽, 남을 추천하여 나아가게 하고 자기는 사양함) 하였다고 하며 행적의 대략은 달성 서거정이 지은 비명(碑銘)에도 새겨져 있다. 우리 문벌과 세계는 급제공(6세 휘 瑨)으로부터 세상을 피해 벼슬하지 않은 이래로 대를 이어 등과하고 아울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판밀직공(7세 휘 尊庇)과 행촌공(9세 휘 嵒) 두분의 시문이 사람들의 입에 전하여 읊어졌고 혹 동인시집에 실리기도 하였다.
차례로 행촌공께서 돌아가시고 평재공께서 젊은 나이에 이어 돌아가셨으며 용헌공께서는 또 평재공께서 이승을 떠난 해에 태어났고 만년에 급작스럽게 남쪽으로 옳기시자 이 때문에 드디어 돌아가시고 여러 백부께서 이어 돌아가시니 가문의 유고(遺稿)는 유실하여 거의 없어졌다.

아! 몹시 애석하도다. 나의 가친(사암공)께서 형제중에 가장 젊었으니 용현공께서 재세(在歲) 하실무렵에는 7, 8세의 어린이였다. 가친께서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아닌게 아니라 잠을 폐하고 먹는 것도 잊으면서 애태우다가 다행히 양대 할아버지께서 남긴 시문(詩文) 중 망실한 나머지 약간을 얻어서 소중하게 간직 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고 하였다.

마침 내종형 윤호(尹壕, 용헌공의 외손)가 영남지방의 민정을 살피게 되었는데 관향인 철성은 동제사의 관할구역내에 속하였다. 형이 행차도중에 괴산군수인 가친을 봐오니, 가친께서 드디어 유고를 새기도록 당부하였다. 이에 판각은 본현에 두게하고 곧 편지와 아울러 유고를 서울로 보내어 내종형 유윤겸(柳允謙, 용헌공의 외손)에게 부탁하여 교정을 하게 하였다. 형(윤겸)이 이에 그 착오를 바로잡고 겸하여 족보를 도시(圖示)하여 해서(楷書)로 써서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숙도(叔度, 13세 휘 則)와 함께 일을 하였는데 숙도가 봉독하기를 여러번하여 손에서 차마 놓지못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생각하건대 대저 시(詩)가 사물에 대하여 지음은 마음으로 부터 시를 읊기 때문에 그 시를 읽으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이제 다행히 선조의 시를 얻어보니 무릇 선조의 풍류와 지절(志節)과 문장과 정사(政事)를 대개 그 만에 하나로도 그 의용이 엄연함을 상상해 볼 만한 즉 한번 눈에 접하고도 꿈에서 구하던 것을 얻지 못할 까닭이 없어졌다. 우리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들의 후손에 있어서랴?
일찌기 종헝 첨추공 윌(越 13세)의 집에 공민왕이 친히 그린 행촌공의 영상과 또 용헌공의 영상을 보유한 것을 보았으니 어찌 찾아서 그 작은 영상을 전하여 책의 첫머리에 붙임으로써 후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그 시를 읽고 그 영상을 보도록 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으로 삼지 않으랴? 드디어 화공이 그 대강을 옮기고 원본은 형에게 돌렸다,
유독 평재공께서 기개가 높고 절개가 굳었는데도 남겨진 영상이 전하지 않고 행촌공께서 문장이 우아하고 시가(詩歌)가 고상했는데도 남겨놓은 문집이 없으니 애석한 바이다. 어찌 자손의 불행이요 만세의 유한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가문의 문집은 또 마땅히 만세에 전할 것인 즉 행촌공의 유상(遺像)도 마땅히 평재공의 문장과 함께 드리워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후세의 자손이 미쳐 알지못하는 바는 국사가 있으면 보존되어 거의 무궁하게 한을 위로할 것이다.
내가 양 집(集)의 서문을 달성 서거정에게 청탁했더니 달성이 이르기를

「근세에 진산인 강희안 부자가 모두 시집이 있어서 한 질로 엮고 이름하기를 진산세고라 하였다. 이제 이 또한 마땅히 철성연방이라 이름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 드디어 합하여 한집으로 하여 재(齋)의 이름과는 달리하였다』


1476년 정월 손자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육(陸· 13世 사암공파) 근서
후손 승필(承弼· 29世 참판공파) 근역

4. 병오년(1726)에 발간된 병오보(丙午譜)


일찍이 우리 문중에 선대의 성대했던 덕업(德業)을 후손에게 전할 수 있는 완전한 족보가 없어서 근심하던 많은 선현(先賢) 중 1628년에 휘 석(晳, 20世 동추공파)께서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일가들에게 연락이 닫는 대로 족보의 단자(單子)를 수합하여 손수 정리한 것을 그의 아들 휘 명규(命圭, 21世 동추공파)에게 맡기고 돌아가셨다.
그후 휘 命圭는 종형 휘 섭(燮, 21세 둔재공파)과 宗人 휘 기(淇, 21세 사임공파)와 협력하여 1726년 병오년에 4권의 족보를 필사본(筆寫木)으로 발간하였다.
제l권(天)에는 고성현 건치(建置) 연혁, 고성이씨 명신록(名臣錄), 고성이씨 선세비명(先世碑銘), 선세세계도(先世世系圖) 등과 시조로부터 13세까지의 세덕(世德)이 수록되어 있다.
제2권(地)에는 14세부터 19세까지, 제3권(人-上)과 제4권(人-下)에는 20세부터 25세까지 각파별로 선세(先世)의 세덕(世德)이 수록되어 있다.
휘 섭(燮, 21世 둔재공파)께서 써신 서문 번역문은 다음과 같고 휘 명규(命圭, 21世 동추공파)께서 써신 서문은 생략한다.

『생각하건대 우리 고성이씨는 세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서 동방의 대성(大姓)이 되었으나 다만 보첩(譜牒)의 전함이 없으니 진실로 우리 종문(宗門)의 불행이다. 고로 나의 선고께서 일찍이 크게 슬퍼하여 족보 작성할 것에 뜻을 두었는데 여려 종친들이 각처 고을에 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살고 있어서 계보(系譜) 기록의 밝힘이 없어 사업을 끝내 이루지 못해서 내 불초(不肖)로서 감히 남기신 뜻을 쫓아 이어서 성사 시키고자 했는데 시일이 많이 지나 버렸다. 지난 기해년(1719)에 종제(宗弟) 기(淇), 字 여첨(汝瞻)이 서울의 내집에 찾아와서 족보를 만들 뜻을 말하거늘 나는 얼마나 다행한가? 이 동지를 만났으니! 곧 글월을 각처에 살고 있는 종친에게 보내서 단자(單子)를 수집한 것이 거의 10년이나 되니 몸은 외롭고 성품은 옹질해져서 매양 무기력한 슬픔이 절실했다. 을사년(1725) 초여름에 종제(宗弟) 명규(命圭) 字를 백용을 만나 이 사업에 말이 미치니 종제가 안색을 바꾸면서 말하기를 망부(亡父)께서 또한 일찍 뜻을 두어 10년을 부지런히 힘쓰기를 쌓았어도 끝내 온전한 족보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지금 그 손수 쓰신 한권의 책이 상자에 간직되어 있다고 하니, 아! 백용도 나와 더부러 같은 감응이다. 이 해 6월에 내가 기다려서 백용을 만날때에 여첨(汝瞻)이 공주로부터 와서 같이 나의 집에 모여서 근간을 확실하게 할 것을 헤아려 정하고 근일에 수집한 단자를 참고하고 백용집에 간직한 보책을 줄기로 하여 오류된 것을 바로 잡고 누락된 것을 상세히 하여 병오년(1726) 여름에 처음으로 편집을 끝 마치니 아! 이는 우리 종문이 수백년간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는데 나의 선군(先君)께서 주야로 근심한 것이 지금 두 사람의 종제(宗弟)로 인해서 그일을 능히 이루니 그 또한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인저! 불초 오늘의 감동은 마땅히 어떻게 다함이 있오리요. 이와 같아 이어서 새롭게 하고 새겨서 발행하는 장차 그 사람에 있을 것인져! 』


기유년(1729) 4월 후손 내자봉사 섭(燮, 21세 둔재공파) 근지
후손 윤복(潤福, 32世 사암공파) 근역

5. 계유년(1753)에 발간된 계유보(癸酉譜)


1476년에 청파공(휘 陸, 13世 사암공파)께서 체계화시킨 철성연방집과 1580년에 야로당(휘 淳, 17世 둔재공파)께서 정리한 야로당 초보, 1597년 송암공(휘 魯, 17世 은암공파)께서 정리하선 사성강목을 함께 정리 조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휘 석생(錫生, 19世 은암공파)과 휘 경윤(景潤, 20世 은암공파)에 이르러 함께 추가 보완하고, 이어서 휘 섭(燮, 21世 둔재공파)과 휘 명규(命圭, 21世 동추공파)께서 계속하여 보완시킨 것을 1751년 신미에 은암공파 22세이신 휘 기(夔, 신사보에는 一夔로 기록)에게 맡기니 公은 야로당 5세 손인 휘 재형(再馨, 21世), 재춘(再春, 21世), 재현(再顯, 21世) 등 여러 종친의 협조를 받고, 집안 동생인 휘 권(權, 22世 은암공파, 신사보에는 一權으로 기록)과 휘 위(葳, 22世 은암공파, 신사보에는 一葳로 기록) 등과 함께 대구(大邱)에 있는 활자(活字)를 사용하여 9권으로 된 족보를 1753년 계유년에 완성하였다.

제1권에는 송암공의 사성강목 서문, 봉사공(휘 燮)의 병오초보 서(1), 동추공파 휘 명규(命圭)의 병오초보 서(2)에 이어 휘 기(夔)의 본 계유보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고성현 건치(建置) 연혁, 고성이씨 명신록 (名臣錄), 고성이씨 선세비명(先世碑銘) 등도 수록되어 있다.
제1권 후반부터 제9권까지는 시조로부터 26세까지의 선대 세덕(世德)이 잘 정리 정돈되어 있다. 휘 기(夔, 22世 은암공파)께서 쓰신 서문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는 근본이 있으니 족보이다. 근본을 아는 것은 본능이니 근본을 아는 것이 가히 효친(孝親)이오 목족(睦族)이다. 하늘이 사람을 낳아서 화목(和睦)하게 하니 사람의 족보는 슬기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족보를 아는 것은 천리(天理)요 인지(人知)가 아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고성이씨는 예로부터 어질고 효도하고 뛰어나고 깨달은 어른이 많아서 칭찬받고 의젓하고 높은 벼슬을 하여 우리나라에서 크고 큰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점점 다른 곳으로 멀리가서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아서 가끔 바둑돌처럼 흩어지고 별처럼 나열하게 되었다.

아! 한 사람으로서 시작하여 길가는 모르는 사람에 이르게 되니 근본이 있어도 근본을 알지 못하니 대현인(大賢人) 후친(厚親) 돈족자(敦族者)라도 스스로 한쓰럽고 슬픈 바가 어찌 없으리오. 이애 옛날 청파공이 철성연방집을 저작한 바의 까닭이요. 아득히 멀리 우리 송암공(松巖公)이 옛날에는 족보 편찬에 전념하였을 것이며 그러한 연속적인 노력으로 가까이는 집안 상자에서 찾았고 멀리는 국사에서 채취를 독실(篤實)히 해서 해를 거듭하기 15년에 처음으로 책이 완성되니 이름하여 사성강목(四姓綱目)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원(源)과 파본(派本)과 지(支)의 윤서(倫序)가 잘 정리되어 두터운 화합과 친족간의 화목의 의리(誼理)가 잘 밝혀져야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서문에 이르기를 이 족보를 가지고 보전여부(保全與否)는 창생(蒼生)들에게 부탁할 따름이니 여기에 기대하는 바 이라고 하였다. 우리 고조고(高祖考) 괴당공(槐堂公)에 이르러 가정충효로서 이어서 꾸미고 기술하여 밝혀서 간송(澗松) 조선생(趙先生)의 서책(書冊)을 상고(詳考) 하고 성산(星山) 야로당공 (野老堂公)의 초보(草譜)에 질정(質定, 갈피를 잡고 헤아려서 작정함) 하여 흐름에 따라 근원을 찾아 옛 것을 참고하여 책을 만들고 그 후에 그 추효(追孝)의 뜻을 송암공(松巖公)의 빛남에서 애연(藹然)히 볼 수 있었는데 애석하도다. 사업을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어서 증조고(曾祖考)와 조고(祖考)에 이르러 그 도를 본 받아서 수보(修譜)에 힘섰으니 선조들의 의지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끝내 뜻은 있었어도 이루지 못하고 원통(寃痛)을 머금고 애통을 안았으니 불초 소자로 하여금 가슴에 새겨 눈물을 흘리게 하니 슬프도다. 이리하여 서울에 사는 종친 섭(燮)씨가 명규(命圭) 씨와 더부러 또한 분개(憤慨)하여 원근 향리에 널리 알려서 내외의 제첩(諸牒)을 거두어서 가히 인쇄에 이르렀는데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섭(燮)씨도 또한 사망하고 명규(命圭)씨만 홀로 남았으니 아! 우리 종족은 장차 족보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얼마 지나서 신미년(1751) 가을에 불초 내가 서울에 마침 일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우리 종친이 많이 살고 있어서 종족 들을 모아 의논해서 다른 집안들은 모두 족보가 있는데 우리만 홀로 없다고 말 했더니 영남에 활자가 있다고 들었다며 보사(譜事)를 나에게 맡기거늘 나는 사양하고 감히 받지않고 돌아왔는데 내 스스로 마음에 말하기를 이 사업은 오종(吾宗)의 중대사요 우리 선조께서 한을 품은 일이니 어찌 감히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리오 라고 하고 드디어 여러 고을 여러 파(派)에 통고를 내어 모든 파의 단자(單子)가 모두 작성되어 1년이 지나는 동안에 이르러 마침 종친 원근(元根)씨가 와서 일을 주간(主幹)했으니 원근씨는 곧 야로당공(野老堂公)의 6대손이니 또한 조선(祖先)을 밝히는 뜻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집안에 간직한 사성강목(四姓網目) 및 제파보첩(諸派譜牒)과 섭(燮)씨가 옛날 가다듬은 바의 초고(草橋)를 참고하여 서로 증험(證驗)하고 개정하고 누락된 것은 보충하고 바로잡아 밝히었고 송암공이 편집한 바의 사성강목을 삼가 살펴보니 시중공(待中公) 휘 엄충(嚴冲)으로 휘 인충(麟冲)의 백씨(伯氏)로 삼고서 주(註)에 말하기를 경인년(1590) 겨울에 내(송암공)가 서울에서 첫 벼슬길에 성주(星州)를 지나며 이수사(李秀士) 순(淳, 야로당) 댁에 묵으면서 세첩(世牒)을 구해보고 분파를 찾아보니 휘 엄충(嚴冲)이 휘 인충 (麟冲)의 백(伯)씨로 되어 있는지라 고로 이 기록을 보고 밝혀 바로 잡았다고 했는데 지금 각처 사보(私譜) 와 제파(諸派)는 모두 휘 인충(麟冲)을 백씨(伯氏)로 삼은 일이 백년이니 전일을 믿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몸을 나눠서 두 몸으로 해서 곧 백(伯)씨와 계(季)씨를 어찌 반드시 굳이 변정(辯正) 하리오. 현묘(玄妙)하고 심원(深遠)한 일은 중의(衆意)에 따르는 것이 옳아서 나는 중의에 따랐으며 적자 (嫡子)와 서자(庶子)는 엄격히 구별해서 밝게 바루고자 하였으나 혹(或) 범분자(犯分者)가 없지 않을 것인져! 이 적자(嫡子) 저 서자(庶子)라고 하는 것은 집사(執事)된 자가 하나 하나 나누는 것을 두려워 했는데 나는 단자에 따랐을 뿐이니 후대의 식자(識者)가 나무라고 꾸지람이 없을 것인저! 그 원(源)과 파(派)를 공평히 생각하고 그 줄기와 가지를 따라서 바루고 개정해서 책을 엮으니 많고 많은 책이 쌓여서 1, 2로 나눠 9책(九冊)이 되어 가제(家弟) 권(權, 산사보에 一權으로 기록)과 재종제 위(葳, 신사보에는 -葳로 기록)로 하여금 본초(本草)를 쓰게 하고 대구에 있는 활자를 사용하여 일년 반이 지나서 족보를 완성하니 아! 족보 완성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송암공과 괴당공은 현명했음에도 완성에는 미급했고 증조고(曾祖考)와 조고(祖考)는 효성스러웠음에도 미완성했고 섭(燮)씨와 명규(命圭)씨도 더욱 힘쓰고 더욱 간절하게 칠,팔년을 노력했음에도 성사하지 못하고 불초 나에 이르러 오늘에야 성사하나 이는 어찌 불초의 힘씀이리오? 정말 성대(盛大)한 것은 우리 족보를 보전하고 우리 족보를 성사시킨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족보가 완성되는 날 우리 옛 일을 회상하고 감동하여 생각을 이르켜 족보책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족보는 친함과 근본을 두텁게 하는 교화(敎化)에 보태고 더했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선조를 나타내서 지난 일을 잇는 일에 느낌이 없지 않았음을 말한다.』

계유년(1753) 불초 후손 기(變, 22世 은앙공파) 근발
후손 윤복(潤福, 32世 사암공파) 근역

6. 정묘년(1807)에 발간된 정묘보(丁卯譜)


1753년에 발간된 계유보가 세계(世系)를 연결시키지 못한 부분이 허다하여 소목(昭穆)의 차례를 잃은 예가 있었다. 또한 계유보 발간 후 50여 년이 지난 시점 이라 종친들의 생사기록이 대부분 맞지 않으므로 문중 원로들께서 이를 노심초사 하던 중 1804년 휘 탁(琢, 22世 사암공파)께서 몇 종친들과 함께 통문 300여 매를 인쇄하여 편지와 함께 전국 8도에 보낸 뒤 다음해인 1805년 묘향시에 종의(宗意)가 일치되어 청주 상당사원에 보소를 설치하고 약 3년간 청주의 휘 수(琇)와 휘 재희(在凞)씨 외 많은 종친들이 고심혈성(苦心血誠)하여 1807년에 9권의 정묘보를 발간하였다.
정묘보에 서문을 쓰신 분은 휘 주정(周禎, 24世 참판공파), 휘 수(琇, 24世 도촌공파), 휘 영(潁, 26世 도촌공파) 등 세분이시고. 휘 용(鏞, 25세 사암공파)께서는 발문을 쓰셨으며 여기에는 휘 주정공의 서문만을 적는다,
『우리 고성이씨는 실로 우리나라의 대성이다. 고려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이름 높은 어른과 큰 벼슬한 어른을 헤아릴 수 없고 덕스러운 행실과 문학예술은 역사에 연달아 쓰여저서 쌓임이 두텁고 흐름이 길었다. 경기, 영남, 호남, 함경에 살고 있는 자손들이 천백 명만이 아니고 비록 파(派)로 나누고 지방으로 헤어져 있으나 길가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타인이 아니고 은불사공(隱不仕公, 시조 휘 황 철령군) 에서 같이 났으니 이 모두 우리의 지극히 가까운 친족들이다. 아! 희공(姬公)이 주례(周禮)를 저술하고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어서 특히 씨족에 관해서 상세히 한 것은 성인의 깊은 뜻을 대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씨족의 보계(譜系) 규범이 밝지 않으면 효제(孝悌)를 높이 받들지 못하고 문헌이 날로 없어지고 시일이 달라져서 사물이 변해지면 장차 그것으로 태어난 바를 알지 못한다.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난 바를 알지 못하면 아! 문헌의 밝힘이 없는 것이 뉘가 우리 종문(宗門)과 같음이 있으리오.
병오 초보(草譜)는 도사공(都事公) 섭(燮)씨에게서 나왔는데 대개 10여 년간에 걸쳐 정성을 모아 공평하게 하였으되 원보(元譜)와 더불어 별보(別譜)의 나눔이 없는 것을 하지 못했고 나눠서 별보로 하는 것은 폄하(貶下)하는 것이 아니니 상고(詳考)하기에 부족하다. 계유년(1753)에 이르러 기(夔)씨가 간행한 족보는 왕왕 소목(昭穆)의 차례를 잃어서 명분을 어지럽혀 사람들이 족보라고 이르지 않고 혹 이어서 수보자(修譜者) 도 취하고 버리니 가히 알수 있다. 갑자년(1804) 11월에 내가 국자전한(國子典翰, 종3품)으로 서울에 타향살이 할때 종장(宗丈) 탁(琢)씨가 한 두 종인(宗人)과 더불어 통문(通文) 삼백여 매를 인쇄하여 펀지와 같이 팔도에 급히 보내서 다음해 10월 광주(廣州) 입비동(立碑洞) 선산하 재회(齋會)에서 의논이 드디어 일치되었다.
처음 남한산에 보소(譜所)를 설치하고자 했는데 교통이 원활치 못해 청주(淸州)의 상당사원{上黨寺院)에 옮겨 3년이 넘은 정묘년(1807)에 비로소 역사(役事)를 마쳤다. 아! 이는 백년을 쌓아 미쳐 겨를을 내지 못한 거사를 오늘에야 이뤘으니 비록 간사제족(幹事諸族)의 고심혈성(苦心血誠)에 연유한 것이나 또한 어찌 우리 종족의 창성(昌盛)하고 위대하게 할 약동의 기회가 아니리오. 한가지는 조상의 미덕을 추사(追思) 하는 일이요. 한가지는 종족을 보전하는 일이니 길사유상(吉事有祥)이 어느 것이 이 보다도 더 크리오. 편집 범례는 첫째 병오초보로서 정으로 삼고 대략의 보충과 삭제를 했는데 나는 꼭 가히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일시의 총명은 한이 있고 백세의 공의(公議)는 멸하지 않으니 다하지 못한 것은 일시 다음 학행의 미덕자에게 기대하며 무릇 우리 족보를 만든 자는 백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천리를 하나의 마을로 사귀어 친후(親厚) 돈목(敦睦)하여 조선(祖先)의 끼친 덕을 욕되지 않게하면 장차 영원히 송사(頌辭)가 있을 것이다. 힘쓰고 힘쓸지어다. 나는 혼자 이 도(道)에 벼슬하여 이번 보사(譜事)의 모든 경위를 참여하여 듣고서 보사는 곧 나의 일이니 외람되게 두서없는 말로서 책 머리에 이름을 부친다,』
정묘년(1807) 10월 후손 통훈대부 결성현감 주정(周視, 24世 참판공파) 근서
후손 윤복(潤福, 32世 사암공파) 근역

7. 갑술년(1874)에 발간된 갑술보(甲戌譜)


정묘보를 발간한 후 68년이 되어 세대(世代)와 생졸관계 기록이 너무나 부정확하여 새로운 족보를 만들 것을 1871년에 발의하여 후손 진일(震逸)공께서 11년간 단독으로 보행하여 초단을 수집한 것을 문희공 산하에 있는 보소에서 3년동안 대 역사를 마치니 16권의 갑술보가 완성되었다.
서문은 휘 정운(庭雲, 26세 참판공파)과 휘 행규(行逵, 27世 도촌공파)이 쓰셨으며, 휘 정운이 쓴 서문의 번역문을 여기에 적는다.
『우리 이씨는 성(姓)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이름 높은 어른이 나서 국사에 갖추어 실렸고 높은 덕과 깊은 학문과 아름다운 높은 벼슬과 큰 공훈의 성(盛)함은 후손들의 사사로움을 바라지 않아도 스스로 드날렸다. 생각하건대 그 뿌리가 깊어야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어서 파(派)가 나누어져 팔도에 별처럼 흩어지고 바둑알처럼 깔려서 족친을 족보가 아니면 그 단서를 상고(詳考)할 수 없게 되니 이것이 옛날 병오년(1726), 계유년(1753), 정묘년(1807)의 3대족보를 만든 까닭이다.
정묘년은 지금으로부터 68년의 오랜 세월이 되니 세(世)와 대(代)가 바뀌고 문호(門戶)가 더욱 번성해서 행제(行第,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의 명자(名字)를 구보(舊譜)에 참여기록 한 자도 생존자가 얼마 안되니 이에 경향 각지의 여러 종친이 후일에 문헌의 밝힘이 부족할 것을 심히 두려워하여 새 족보를 만들 바를 기획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합하였으나 정중하게 합의하지 못하고 간혹 한 두 파(派)는 자기에게 치우치게 편집한 것이 있으나 하나의 통일된 방편이 아니어서 마음이 불편하여 신미년(1871) 가을에 이르러 충청의 여러 종친이 원근에 통고하여 여론을 수합하고 경기, 호남, 영남에서 거리가 같은 문의(文義) 산하에 보소(譜所)를 설치하여 2년을 지나 역사(役事)를 처음 마쳤다.
대개 그 책머리에 범례를 들고 병오초보를 시초로 하여 파(派)와 계(系)를 줄지어 기록하고 정묘보를 표준으로 삼고 부보(附譜)와 별보(別譜)의 유적이 있는 것은 원보(元譜)에 등재하여 합하니 16권이 되었다. 이는 우리 종중이 이룬 한 쌍의 커다란 역사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어서 우리 종친은 가까이에서 먼 곳으로 받들고 친한데서 성근데까지 미쳐서 여기에서 조상을 존경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밝히고 여기에서 돈독(敦篤)하고 화목하는 의리를 익히고 여기에서 유지(遺志)를 계승하고 사업을 펴는 규범을 생각해서 사람사람이 사귐에 힘쓰고 대대로 욕됨이 없으면 우리 이씨의 창대(昌大)하는 기회가 장차 여기에 터전하리니 이에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다리는 바이다.
나는 늙고 또 병들어서 간행하는 일의 시종(始終)을 볼 수 없지만 그 편집차례는 또한 관여해서 알고 있다. 큰 역사를 맡은 모든 종친이 정성을 다해 힘써서 성취한 그 위선봉사(爲先奉事)를 가상(嘉尙)하며 나아가서 한 두 마디 약서(略敍)를 첫 머리에 부치니 분수에 넘치는 죄로 도망갈 곳 없는 바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옛날 소노천(蘇老泉)은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뭉게 구름이 피어 오르듯 생길 것이라고 말했는데 어찌 다만 소씨족보(蘇氏族譜)에만 그러하리오. 나는 우리 족보에도 또한 말한다.』
갑술년(1874) 늦봄 후손 정운(庭雲, 26世 참판공파) 근서
후손 윤복(潤福, 32世 사암공파) 근역

8. 을묘년(1915)에 발간된 을묘보(乙卯譜)


우리 족보는 철성연방집에 이어 병오초보, 계유보, 정묘보, 갑술보가 차례로 발간되었으나 아직도 상세하지 못하고 또한 누락된 파류(派流)도 있었다.
이렇게 갑술보가 발간된지 40여년이 지나 1914년 가을 경기도 포천에서 발의하여 왕묘동 아래 유호재에서 여러 문중 대표가 모여서 이전의 족보보다 충실하고 보완된 족보를 만들기로 뜻을 모우고 갑술보 발간시의 규정에 의거하고, 휘 종하(鍾夏, 28世 참판공파), 휘 승열(承烈, 29世 참판공파), 휘 종기(鍾夔, 28 世 참판공파), 휘 태(⺩泰, 27世 참판공파) 등과 그외 여러 종친들이 협력하여 열성을 다한 결과 1915년(을묘)에 새로운 족보인 을묘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초권에는 서문 2편, 발문 2편, 명현열전으로 시조공, 文山公, 文僖公, 文憲公, 杏村公, 桃村公, 平齋公, 侍中公, 隱巖公 등에 대한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1권에는 안정공파, 2권에는 둔재공파, 3권에는 호군공파, 4권에는 좌윤공파, 5권에는 동추공파와 병사공파, 6, 7, 8, 9, 10권에는 참판공파, 11, 12권에는 사암공파, 13, 14권에는 도촌공파, 15, 16권에는 은암공파의 선대-후대의 사유가 실려 있다.
서문을 쓰신 분은 휘 종하(鍾夏, 28世 참판공파)와 휘 승열(承烈, 29世 참판공파) 이시다. 여기에는 휘 종하공이 쓰신 서문의 번역문 만 기록한다.
『족보는 옛날의 성원 씨족지(姓苑 氏族志)의 유법(遺法)이다. 대개 성씨는 종족이 있고 종족은 무리가 있고 무리가 나뉘어져 육친(六親)이 다하면 종문(宗門)이 바뀌는 것이다. 일조(一祖) 천손(千孫)이 별처럼 흩어지고 바둑처럼 펼쳐저 너무 커지면 하나로 거느릴 수가 없어 아무 씨족인지, 아무 조손(祖孫)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이씨는 득성해서부터 면면히 오육세를 이어왔다. 중엽에 이르러 병령(炳靈, 밝고 신령스러움)하여 명공거경(名公鉅卿)과 홍유(鴻儒, 대학자), 석장(碩匠, 그 방면에 뛰어난 사람)이 계속하여 이어지고 큰 공훈과 큰 덕이 청사에 가득 채워져 밝게 빛났으며, 경학문장(經學文章)이 가승(家乘, 한 집안의 족보나 문집)에 실린 것이 자세하고 많아서 세덕의 기송(杞宋, 문헌 자료를 말함)으로 삼았다.
우리 종족은 팔도에 분포되어 거의 만천에 이르러 10여 世가 지났지만 계서(系緖)의 분별과 소목(昭穆, 사당에 조상을 모시는 차례)의 차례가 성글고 멀어 통솔함에 만자손이 하나의 근본임을 밝히기란 쉽지가 않아 천속(天屬, 부모와 아들의 관계)이 도리어 노인(路人) 처름 되어 요혼찰차(夭昏札瘥, 태어나 이름도 짓기전에 죽는 것)의 근심과 기한궤핍(飢寒匱乏, 굶주리고 궁핍함)의 우려로 아득히 서로를 모르고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같은 선조를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처음 병오보, 중간 계유보, 마지막 정묘보 전후로 세 번의 족보가 차례대로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기록이 상세하지 않고 생략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파류(派流)는 빠지는 등 잘못됨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갑술년에 각 도의 집안이 같은 소리로 널리 찾고 모아서 간략하게 된 것은 자세히 하고, 누락된 것은 보충한 연후에 비로소 가히 한벌의 마땅하고 돈독한 족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상(星霜)이 너무 빨라 어느덧 40여년이 되었다. 사람과 세대가 바뀌면 엄연히 존망의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매번 헤아려서 일부 책을 계속 편찬해서 영원토록 볼수 있기를 도모하였으나 재력은 약하고 힘은 모자라 돌이켜 보아도 큰 일이라 겨를을 내지 못했다.
전년 가을, 포천에서 먼저 내 마음을 알았는지 발문하여 문의면 왕묘동에 모이기를 기약해서 불초를 잘못 천거하여 이 역사(役事)를 주관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직 늙고 무능한 사람인지라 진실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집안의 족보이기 때문에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 대신 막내 동생 종기(鍾夔)와 족숙 태씨와 서로 역할을 맡아 같이 도와서 일반적인 사례들을 하나같이 갑술년에 정한 규정대로 하고 위치는 문의면 대일리로 하니 그곳은 마침 포천문중과 가까운 곳이긴 하나 때가 맞지않아 마침내 문의면 관사와 가까운 왕묘동에서 이루어지니 적당한 곳은 아니지만 선령(先靈)의 오르내림이 이곳에 있으며 후손들의 갱장(羹墻, 선조를 추모하는 일)도 이곳에 있으므로 족보가 만들어진 뒤에 우리와 같은 족보에 수록된 사람이 선조의 도우시는 남긴 뜻을 체험하고 거족들의 한 근본이라는 두터운 정의들 생각하며, 각자 힘쓰고 가다듬어 공경스럽게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사랑하여, 가까이는 친하게 하고 멀리도 보살펴서 자자손손이 바꾸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아마도 부폐(쓰러지고 피폐함) 해지는 근심이 없이 중엽의 밝고 신령스러운 일들이 멀지않아 돌아올 것이다.』
을묘(1915년) 춘삼월 후손 종하(28세 참판공파) 근저
후손 두조(29세 병사공파) 근역

9. 경진년(1940)에 발간된 경진보(庚辰譜)


1915년에 족보를 발간한지 23년이 지난 1938년 가을, 문희공 선세 묘향시에 영호남 종친들이 족보를 중간하자는 발의가 있었고 다음해 봄에 전국에 통문을 보내고 유호재에 보소를 설치하였다.
이전에 발간된 여러번의 족보와 각 파보를 수합하고 누락된 부분을 수단하여 약 2년 동안 정리 한 것을 인쇄발간한 것이 경진보(1940년)인데, 세덕편 1권과 세계도 2권, 시조로부터 33세까지의 사유(事由)를 기록한 10권을 합하여 모두 13권 1질이 되었다.
경진보에는 휘 순흠(舜欽, 26세 둔재공파), 휘 호철(鎬哲, 26세 안정공파), 휘 정열(正烈, 29세 도촌공파) 등 세분이 서문을 쓰셨으며 대전시 이문사에서 인쇄하였고, 순흠(舜欽)공께서 쓰신 서문의 번역문만 남긴다.

『옛적 성왕(成王)의 주나라 제도에 사상(司商)이란 사람이 성(姓)을 주는 일을 관장(管掌)하였고 소사 (小史)라는 사람이 세계(世系)를 정하여 통서(統緖)하여 후대에 밝혀 가까운데 부터 사랑하여 먼곳에 미치게 한 것이 후세 보법(譜法)의 유기(由起)한 바이다. 우리 고성이씨는 시조로부터 철령(鐵嶺)에 수봉(受封)하여 고려와 조선 두 왕대의 사이에 자손의 문무의관(文武衣冠) 성대함이 국중(國中)에 현저(顯著)하여 명공현상(名公賢相)이 역사에 펼쳐진 자(者)가 무려 수십인 이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문희공(文熺公)께서 명을 받아 조정 지키는 업무를 3년동안 담당한 덕으로써 물정(物政)을 진정하니 국내가 점점 편안하였다. 조선 세종 때 수문(守文, 조업을 계승하여 나라를 글로서 지키고 다스림)의 날을 당하여 양헌공(襄憲公)께서 9년 동안 승상(丞相)이 되어 능히 희화(熙和, 빛나고 화목함)의 다스림을 이루시니 이 더욱 선덕(先德)께서 나라를 위하신 것으로 사람들이 전송(傳誦)하여 바뀌지 않는다. 중엽(中葉) 무렵에 우리 야로선자(野老先子)께서는 퇴계문하(退溪門下)에 승학(承學)하여 소경조(昭敬朝, 선조왕)때 유일(遺逸, 세상을 버리고 나타나지 않음)로써 여러 번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임진란때 가전문헌(家傳文獻)의 탕일(蕩逸, 방탕하고 절제가 없음)함을 보고 비로소 세승(世乘)을 만드시니 그 뒤로 종문(宗門) 부로(父老)들이 권권(拳拳, 못잊어 뒤돌아보는 모양)하여 수보(修譜)하니 병오보(內午譜), 계유보 (癸酉譜), 정묘보(丁卯譜), 갑술보(甲成譜), 을묘보(乙卯譜) 무릇 다섯 번이나 하면서 그 파류(派流)를 분별하고 일원(一源)을 통회(統會)하니 아무런 차질과 자손간에 알아보지 못하는 등의 실수가 없는 것은 참으로 종문(宗門)을 통한 백세의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의 기미(機微)는 바뀌고 미루어 인사도 함께 지나가니 이제에 보건대 을묘보는 30년이 넘지 않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문득 부지불식간에 변해가는 느낌을 가지고 또 당시의 결혼하지 않았거나 기록에 실리지 않은 자도 모두 장대하였으며 자손이 다른 나라 이역에 사는 자들도 또한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하러라. 진실로 이런 때에 다시 족보세계(族譜世系)를 꾸미지 않는다면 뒷날에 계속되기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이번에 문의면 문희공 추향(秋亨)때에 의논을 정하고 보역(譜役)을 일으키고 2년 넘어서야 비로소 마칠 수 있었다.

중간에 비록 약간 부득이한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한 자 있었으나 그렇지만 성서(成書)한 것을 짚어본즉 우리 집안이 경기와 관동과 호남과 영남이 대동보(大同譜)를 발간한 것은 실로 지금부터 시작할 것이다. 인강(人綱)에 처하여 매듭을 푸는 기회가 능히 이 역사(役事)에 마침이 있을 것이다. 어찌 당임(當任) 모모(某某) 제공(諸公)들의 쫓고 따른 고성(苦誠)이 아니겠는가! 아 한탄스럽다. 때는 고금이 있겠지만 도(道)는 고금이 없는 것이니 이 책을 보는자는 모름지기 전세(前世)의 덕과 선을 강구하여 자기 몸에 돌이켜 자려(自勵)하는데 제일의 뜻을 삼은 즉 거의 가풍이 영원토록 의탁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능히 깊게 종당(宗黨)의 훗날에 일어나는 군영(群英, 群雄)에 바램이 있을 것인져!』
경진년(1940) 11월 16일 후손 순흠(舜欽, 26世 둔재공파) 근서
후손 두조(斗祚, 29世 벙사공파) 근역

10. 병진년(1976)에 발간된 병진보(丙辰譜)


경진보를 발간한지 30여 년 동안 민족해방과 6.25전란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대이동과 함께 우리 고성이씨 후손들도 거주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많은 세월이 흘렀다.
따라서 8회에 걸쳐 발간한 족보와 경진보를 발간한 이후에 각파에서 숙산공(繡山公) 파보, 명암공(明嚴公) 파보, 상매당(雙梅堂) 파보, 초계공(草溪公) 파보, 호군공(護軍公) 파보, 유수공(留守公) 파보, 고성지역(병사, 사암, 도촌) 파보 등을 취합하고 근세의 자손 사유(事由)를 총망라하여 4권 1질로 병진보를 발간하였다.
서문은 휘 종은(鍾殷, 28世 참판공파)께서 썼고, 편집후기는 휘 명열(命烈, 29世 둔재공파)꺼l서 쓰셨으며 종은공(鍾殷公)께서 찬하신 서문의 번역문 만을 수록한다.
『 씨족들의 족보는 대개 3가지 대의(大義)가 있으니 선조를 밝히고 종족을 서계(序系)함과 종문(宗門)을 거두는 것이니 이는 실제로 인도(人道)의 대강(大綱, 대 강령의 준말)이고 세보(世譜)의 기인인 것이다. 사람은 다 질서가 정연하게 그 종족을 서계(序系)하고 그 문족(門族)을 거둔다면 천하의 질서가 정연하게 윤서(倫序, 차례)가 있어 스스로 평화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를 돌이킨다면 빠르게 새나 짐승들의 지경으로 둘아 갈 것이다. 이렇게 관계되는 바 중요하지 않으리오.

정부자(程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의 인심을 관섭(管攝)하는 것이 종족을 거두고 보계(譜系)를 밝히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니 이를 말미암아 보건데 능히 인류의 이륜(彛倫,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을 밝히고 방국(邦國)의 풍화(風化)에 도움이 있게 하는 것은 아마도 족보를 만드는 것보다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어찌 세사(細事)라 하겠는가!
우리 이씨가 병오년에 족보를 만든 이래로부터 계유보, 정묘보, 갑술보 까지 차례로 수보(修譜)하여 지 난 을묘보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널리 찾고 많이 가려내어 갖추어 실으니 선조를 밝히고 족종(族宗)을 거두는 도(道)가 아무런 여감(餘憾)이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 집안의 일부 돈독한 역사이다. 그러나 광음이 너무 빨라 어느덧 60년이 되었다. 오래되어 세대가 바뀌고 존망도 모를 뿐 아니라 생치(生齒)도 날로 번성하고 운엽(雲葉)은 막막하여 해양(海洋)의 안팎으로 퍼져 가니 만일 모으고 통솔하는 책이 없다면 마침내 고거(考據, 상고하여 증거로 삼음)하여 그 세계(世系)를 알기 어려우리라. 간혹 각자 파보(派譜)를 만들어 약식(略式)의 수족(收族) 방책으로 보충하나 그 역시 백세일통(百世一統)의 의의가 아닐 뿐 아니라 각각 분기(分岐)함에 점점 소활(疎濶, 서먹 서먹함)의 감정만 더하는 것이니 이대로 맏겨 둔다면 머지않아 근원도 모르고 가지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두렵다.

하물며 세대는 내려가고 풍속이 변하여 윤리강령(倫理綱領)이 무너져 지친(至親)보기를 길거리의 사람같이 하니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 다시 늦추지는 못할 것이다. 이에 종의(宗議)가 준발(峻發)하여 모책(謀策) 을 합해 대동보(大同譜)를 만들기로 하고 나의 선군(先君)을 추대하여 수임(首任)으로 삼으니 구십근력(九十筋力)에 실로 업무를 지탱하기 어려워 여러번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여 이에 불초(不肖)로 하여금 대신 이 역할을 맡게 하시니 내 비록 불민(不敏)하나 감히 명을 어길 수도 없고 저 역시 종의 (宗意)를 중히 여겨 외람되게 중책을 맡아 모으고 기재함을 빠짐없이 하여 반드시 아름다움을 다하려고 기약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강토가 양분됨에 남북이 서로 막혀 풍조(風潮)가 진탕(振蕩)함에 이산(離散)이 무상(無常) 하여 수단(收單)할 즈음에 결손되고 빠지는 혐(嫌, 우려)이 있으나 시세(時勢) 때문이니 어찌하리요! 다만 그 규모는 하나 같이 지난번 을묘보의 구례(舊例)를 따르되 시의(時宜)로 인하여 간략한 것은 더하고 많은 것은 덜기도 하며 또 그 간편함을 꾀하여 4책으로 합성하였다.
팔방의 온 집안이 임의대로 고루 받들어 책상위에 진열하여 조석으로 살핀다면 우리 성씨 세덕(世德)의 본지(本支)와 소목(昭穆)이 하나의 실끝처럼 요연(暸然)하여 황홀하고 같은 뿌리 불억(不億)의 수가 일당(-堂)에 합처(合處)되리니 그 근본을 추구하고 집안을 화목케하는 도리에 또한 제일 가깝지 않으리오! 소씨(蘇氏, 송나라 학자)가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솟아날 것이다 하니 나 역시도 천재(千載)의 뒤에는 그윽히 이에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불초로 편수의 말역(末投)에 참가하여 수단을 절반도 못하고 풍수지통(風水之慟, 부모가 돌아가심을 슬퍼함)을 당함에 이 한스러움을 어찌 다 하리요!
이제 편찬을 마지고 인쇄할 날을 맞으니 더욱 흐르는 눈물 금할 길 없다. 이에 감히 참윌(僣越)함을 헤아리지 않고 느끼는 바를 위와 같이 글을 써서 조심스럽게 받들어 권단(卷端)에 붙여 내자(來者)들이 그 전말(顚末)을 상고하길 기다리노라.』
병진년 0976) 입추절에 후손 종은(鍾殷, 28世 참판공파) 근서
후손 두조(斗祚, 29世 병사공파) 근역

11. 신사년(2001)에 발간한 신사보(辛巳譜)


우리 고성이씨의 족보발간 연혁을 살펴보면 1476년 청파공의 철성연방집, 용헌팔촌도를 시초로 1597년에는 송암공의 사성강목(四姓綱目)에 이어 1726년의 병오초보, 1753년의 계유보, 1807년의 정묘보, 1874년의 갑술보, 1915년의 을묘보, 1940년의 경진보, 1976년의 병진보 등 여덟 번째 족보를 발간한 후 어언 2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숭조목족(崇祖穆族) 이상 고취는 우리 종회의 첫 번째 종시(宗是) 인데 이를 실현하려면 우리 스스로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전국에 거주하는 종친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동근동손(同根同孫)간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고 두 번째 종시(宗是)인 효제(孝悌)와 충신사상올 선양하여 종중 내부의 활동을 강화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세보를 발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확한 단자(單子)를 수집하고 성실하게 편수하여 역사적, 교육적, 가족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가 될 세보를 발간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네번째 종시인 종론을 창달하고 종의를 귀일 시키는데 진력(盡力)해 오던 중, 1997년 10월 22일 대종회 이사회로부터 1998년 3월까지 각종 회의(理事會, 派宗會, 會長團, 顧問)를 4회에 걸친 진지한 토의로 세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신사보는 자손록(子孫錄)의 배열을 보다 명료하게 세계(世系)에 맞추어 기록했으며 이름자는 한자에 한글을 세로로 부기 하였고 생년은 서기로 연, 태세(太歲), 생월일을 음력으로 기재하였으며, 배위는 관향, 성명, 생졸년월일을 기재하였다.

미혼녀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표시하고, 출가녀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재하고 부(夫)의 성명, 관향, 부, 자의 이름을 기재하여 남녀간의 평등한 입장을 표시하였다.
추후 후손들이 족보를 발간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이 신사보 발간에 대한 내용자료만 보면 쉽게 판단하여 발간 할 수 있게끔 작성하여 보았다. 서문은 대종회장 휘 찬(璨, 30세 안정공파)께서 쓰셨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라 고성이씨는 고려 철령군(鐵嶺君) 휘 황(璜)을 시조로 삼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공거경(名公鉅卿)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고 자손이 번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나라 안팎으로 널리 퍼져 있으되 그래도 선조로부터 보면 같은 자손이건만 종족을 보기를 연고가 없는 길가는 남과 같이 함이 많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리오. 옛날 정부자(程夫子)가 말씀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려서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것은 족보의 세계를 밝히는 것만 같음이 없다」하니 대개 족보를 만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뿐이다.
무릇 종족에 족보가 있음은 나라에 국사가 있음과 더불어 그 뜻이 같은 것이다. 족보를 만드는 일이 세상의 도의에 소중하게 관계됨이 이와 같으니 소흘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 명백하도다. 우리의 족보편수는 청파공의 용헌팔촌도를 시초로 하여 정유보로부터 병진보에 이르기까지 무려 8회에 걸쳐 크게 거행하여 종족을 다스리고 세계(世系)를 밝혔으나 유감됨이 없으되 근세에 서양풍습에 점차 물들어서 조석으로 세상이 변천하고, 또한 세월이 흘러서 세대의 차례가 바뀌고 분수에 따라 흩어져 살게되니 이는 세상의 의의가 여기에 있고 또 인심올 다스리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에 찬(璨)은 태산 같은 짐을 지고 누차 모여서 의논하고 보규(譜現)를 제정하여 단자(單子)할 즈음에 인심이 나뉘어 흩어져서 화합하기 어려움이 많아 일이 늦어지고 머뭇거리니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파만류(千派萬流)의 물은 하나의 원천이요, 만지억엽(萬枝億葉)의 나무도 하나의 뿌리어라. 드디어 화합함을 이루니 이는 본심의 당연한 도리이다. 각파 수단취합(收單聚合)으로 병진보를 기준하고 또 보규(譜規)를 상고(詳考)해서 소(昭)는 소(昭)와 목(穆)으로 더불어 함에 찬(璨)은 견문이 좁고 천박함을 모르고 덧붙이고 깎아서 인쇄에 부치니 극히 분수에 넘침을 알고 죄를 피할 곳이 없으나 돈종목족(敦宗睦族)의 정의(情誼)와 선조를 추모하고 후손을 계도하는 도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는 동종제위(同宗諸位)의 심력이 아니면 어찌 이루어 졌으리오, 소노천(蘇老泉)이 이르기를 “내가 길거리의 남처럼 서로 보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처음에는 모두 한 형제였고 형제는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이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가만히 생각하니 분단되어 남북이 막히고 끊어진 까닭으로 많은 종족을 모두 수단(收單)하지 못하여 같은 뿌리의 정을 펴지 못하니 여한이 없지 않도다. 어찌 하리오, 무릇 우리 족보 중 종족은 보록(譜錄)을 집집마다 모시고 사람마다 살펴서 선조의 덕을 이어 닦아서 더럽히지 않는 의리를 다 한다면 먼 종족은 가까워지고 성근 종족은 친해져서 친함을 기약하지 아니해도 스스로 친해져서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구름 피어오르듯 스스로 생겨나서 더욱 정애(情愛)가 두텁고 화목하는 기풍을 떨치니라. 어찌 각자 서로 힘쓰지 아니 하리오. 2001년(선사) 초하절 후손 찬(燦)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