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봉재

일가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웃음소리가 창밖까지 번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금봉재(金鳳齋)


경남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 웅곡에 자리한 우리의 성향지(姓鄕地)에 조상의 얼이 담긴 유적이 관리가 허술하여 초라하였는데 이에 대한 성역화의 일환으로 금봉재재건 및 시조이하 5세6위 설단(設壇) 사업을 추진하자는 종의가 1980년 가을 대종회 총회에서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 중, 전국 각지의 종친들이 동 사업에 일치단결하여 정성어린 표성금을 무려 294명이 총 128,640,000원과 여러 용품 및 조경수를 보내왔으며 또 많은 종친이 헌신 봉사한 공덕으로 1999년에 완결되었다. 이와 같은 대역사(大役事)는 전 종친의 위선하는 마음과 정성으로 이룩하여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업적을 남겼으며 “하면 된다”는 각자의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1. 금봉서원(金團書院)


(1) 금봉서원(金鳳書院)의 내력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 웅곡의 文山公 묘소의 오른 편 산기슭에 고성지방 사림(士林)들이 우리 선조이신 행촌공 휘 암(嵒)과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선생을 배향하고 강학(講學)하며 제향을 모시던 곳으로 어 관포 사망(경술년, 1550년)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서원 모두가 소실되었다. 이 때 원우(院宇)의 편액인 상량문만 전해오고 있다.

(2) 금봉서원 상량문(번역문)


향중의 현인이 돌아가시면 사묘(社廟)에서 제사하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읍자 (邑子, 읍내에 사는 유생)가 향현(鄕賢)을 사모하여 사원(祠院, 사당과 서원)을 세우려 하지 않으리요. 이와 같은 광세(曠世, 세상에 드뭄)의 거사(擧事)는 한 고을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삼가 생각컨대 행촌(杏村), 관포(灌圃) 두 선생은 고생에서 이어서 출생하고 동남의 기백을 타고난 명현(名賢)으로 그 문장과 사업의 성취는 다 국사에 실려있다. 행촌 선생은 고려에서 그 명성이 높이 드러났고 탁월하고 아름다운 행적은 세인에게 널리 전파 되었다.
또 관포 선생은 조선 중기의 어진 선비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그 이름을 드러내더니 세란(世亂)중에 용퇴함으로써 백대의 휘영(煇映, 밝게 비침)을 이루었다. 영웅과 호걸은 천정(天挺)의 말미암은 바이지만 인결은 오로지 지령(地靈, 땅의 정령)에 딸리었다. 여남(汝南, 중국 진나라 사람)은 황현(黃憲, 중국 후한 사람)의 어짐을 사모하더니 현인(賢人)을 받드는 풍속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진나라 비(鄙) 땅 사람은 덕이 있는 양성(陽城)의 가르침을 받드니 효제(孝悌, 효우)를 행하게 되었다. 물환성이(物換星移) 하여 인물은 가고 시대는 바뀌었다. 항상 거처하던 곳은 본래 생육성장하던 고장이요, 모산 모수는 일찌기 상양유식(徜徉遊息, 어슷거리며 노닐다) 하던 곳이었다. 황원삼척(荒原三尺)의 혼은 청오(靑烏)에 붙였고 창해천추(滄海千秋)에 이름은 주작(朱崔)에 매이였다. 숭봉(崇奉, 숭배하고 받듬)할 것을 생각하면서도 옛일에 의존하여 옛날의 풍습과 습관으로 머뭇거려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만인에게 존경받는 군자로도 오세지택(五世之澤)을 면치 못하리니 그 누(陋)를 어찌 하리요. 여침(旅寢, 여행중에 묵는 잠자리)과 주무(周廡)가 다 변변치 못하니 못내 아쉽기만 하다. 유풍여운(遺風餘韻)은 점점 멀어져가고 가언선행(嘉言善行)은 더욱 잊혀져서 후진에게 본보기로 삼을 데가 없어졌으니 식자(識者)는 이를 한탄한다.
유림의 주창으로 서원건립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규모는 이미 정해졌고 설계도도 알맞게 정해졌으며 공사른 담당할 사람도 드러났고 많은 기술자들도 공사에 힘썼다. 산천이 수려한 제일 좋은 터에 서원의 건물은 높았으며 음양의 향배는 합당하였고 재실과 사당도 차례대로 완공하였으며 강당과 거처도 구비되었다. 자연도 무심치 않아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즐겨하고 초목도 아는 듯하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신주를 섬기여 공근(恭謹, 공손하게 근신함) 하고 유림들의 장수여엽(藏修餘業)에도 알맞게 되었다. 혼란기가 지나간 20여년 동안 학교가 쇠하여 한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서고 안에 문헌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어찌 우연이리요. 시운의 기다림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 노래 소리에 맞추어 들보를 올린다.
대들보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가 비록 멀리 보이나 요봉(堯封)의 미풍이 있고 학교를 창설하니 문풍 (文風)이 크게 떨치리라. 대들보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풀숲으로 막혔던 산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으니 큰 뜻은 다시금 어둡고 흐려지지 않으리라. 대들보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굽이치며 흐르는 원천은 푸른 빛이 감돌고 소리개는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 문을 열고 살펴보니 만상(萬像)이 그 속에 잠겼도다.
대들보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솔과 대나무의 푸른 숲은 울창하게 좌우에 늘어섰는데 식물줌에 가장 곧은 것의 으뜸일러라. 대들보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학자는 이제부터 나아갈 바를 알게 되었네. 道는 하늘처럼 높고 후배들이 두려워 하니 우리도 그 높은 데를 향하여 발돋움하리라. 대들보에서 아래를 보니 세상은 밤중처럼 어두운데 우리가 나아갈 길이 힘들다고 하지 말라. 학문에 정진하는 정성이 서원에 가득 찼도다.
상량한 후 학풍은 더욱 넓어지고 문운(文運)이 크게 열리기를 기원하도다. 전하고 아는 자가 향(鄕) 중의 현인(賢人)을 묘당에 제사지냄은 다만 홀로 스스로 덕을 본받아서 학문을 닦으려함 만 아니요, 많은 사람과 함께 행하려 함이었다. 바라건대 우리에게 축복이 내려져서 사문의 가르침이 발전되면 그 영광이 드러날 뿐 아니라 道를 지킴에 전심하고 선비의 풍습이 바른 길로 돌아와서 선인 군자가 많이 배출될 것이니 영원토록 크게 흥하여 다함이 없으리라.

2. 봉산재(鳳山齋)


(1) 봉산재의 유래


시조공께서 고성에 정착하셔서 10여 世까지 사시다가 중년에 우리 선조가 벼슬길에 진출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신 200여년 후 진주 영장으로 부임하신 19세 사암공파 휘 하상(夏相)께서 선세 3묘에 전배(奠拜)한 후 묘역을 사초하고 퇴물된 묘비도 다시 세워 후손된 도리를 다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성지역에 거주하는 종친들과 협의하고 전국적으로 통보하여 선세 봉향과 재사건립 등 모든 위선 문제를 전국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그후 종의에 의해서 건립된 봉산재는 고성군의 동쪽 금봉산 웅곡(熊谷, 곰실)의 경치 좋은 곳에 선조이신 6世 文山公 휘 진(瑨)과 8世 文憲公 휘 우(瑀)의 내외분 묘소에 세향을 받들던 곳으로 산 이름에 따라 봉산재라 하였다.
봉산재는 건립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0년(1684)에 후손 휘 하상(夏相)께서 文山公, 文憲公의 묘소를 찾아 묘역을 사초(沙草)하고 묘비를 세운 기록으로 보아 이 이후에 창건하여 세향을 받들어 오다가 1932년 크게 증수(重修) 하였다.

(2) 봉산재 중수기문(번역문)


고자(古自, 固城) 고을의 산과 바다의 웅장함은 영외(嶺外, 태백 준령의 밖)에서 뛰어났고 군의 동쪽 30리에 봉산 웅곡의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여기는 곧 선조 부원군(府院君) 양세(兩世) 3묘의 제사를 700년 동안 받들 던 곳이다. 자손은 국내에 널리 퍼져 수만으로 헤아려지지만 전호요전(典護燒奠, 산소들 보호하고 제물을 차리는 일)의 예절은 산하 가까운 고을에 사는 후손들이 주로 맡아서 약간의 제수로 세향을 받들어 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해가 오래됨에 따라 재실 건물이 기울어져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내 여러 친족은 선규(先規, 선조때 부터 내려 온 규칙)에 욕됨이 생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책을 의논하고 힘을 모아 신미년(1931) 봄에 대대적인 수리에 착공하여 깨어진 기와와 썩은 재목은 새것으로 갈 아 넣고 헐어진데는 바르고 기울어진 곳은 바쳐 세웠으며 규모는 종전과 같이 하고 대들보도 새 재목으로 바꾸었으니 봉산재는 이제야 완공하게 되었다.

차후는 여기서 불편없이 재실에서 유숙하고 여기서 음복하며 정성과 공경을 근본으로 삼으면 효제지심(孝悌之心,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도 자연히 생길 것이요 선조의 혼령이 오르내리시며 “나도 후손이 있다” 하시리라. 손자는 할아버지를 계승(繼承)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위선(爲先, 선조의 덕을 기리고 섬김)의 도리를 다한다면 이 재실은 장차 영원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어찌 옳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듬해 여름에 정수(庭守)께서 글을 주며 한마디 하도록 책임을 맡기거늘 나도 또한 후손중의 한 사람으로 일찌기 선영(先瑩)을 돌보지 못한 것을 스스로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참이라 이번 공사에 어찌 감히 불문(不文, 글을 잘 하지 못함)이라 하여 사양하리오. 삼가 그 글속에 담긴 뜻을 쓰고 내 의견을 간략하게 붙여 여러 친족이 내게 맡겨준 책임을 면할까 한다.

1932년 10월 상순 후손 종기 짓고
후손 명규 쓰고 후손 윤복 번역하다,




(3) 봉산재(鳳山齋)가 금봉재(金鳳齋)로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 웅곡에 있는 금봉재는 시조 및 5세위의 단향(壇亨, 제단에서 지내는 제사)과 6世 文山公, 8世 文憲公의 묘향을 받드는 고성이씨의 재실로 그 동안 사용해온 금봉재의 이름을 1987년 11월 20일 대종회에서 봉산재로 개칭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오랜동안의 관습 때문에 1991년부터 자연적으로 金鳳齋로 다시 불리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 묘소의 오른 쪽 산기늙에 있던 금봉서원(金鳳書院)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자 이 서원에 모셔졌던 행촌공의 위패를 봉산재(鳳山齋)에 옮겼으나 금봉서원이란 내력 때문에 ‘金鳳齋’ 로도 불리어 왔다.

3. 금봉재(金鳳齋)


(1) 금봉재 상황


서기 1932년에 중수한 금봉재는 수백여년의 세윌이 경과함에 수차례 중수 하였으나 비바람에 씻기어 낡아 비가 새고 헐어서 무너질 상태에 이르렀으며 또한 본재만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참제원(參祭員)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아울러 文山公, 文憲公의 산소 또한 허물어져 초라한 상황이었다, 이에 금봉재 재건 및 확장의 필요성이 높아져 종친간에 재건 촉구의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선조의 생전 뜻인 충효를 받들고 베푼 덕을 빛내며 남긴 유물을 보존함이 근본을 잊지 않고 지난 일을 돌이켜 사모하는 후손으로서의 도리인 것으로 우리의 커다란 소원이었다.

(2) 금봉재 재건사업 추진


1980년 음력 10월 5일 대전 유호재(楡湖齋)에서 대종회 총회시에 고성 유허지(遺墟址) 성역화(聖域化) 와 금봉재 재건, 시조이하 5세위 설단(設壇) 등을 추진하자는 종의(宗意)를 발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으며 위선사업에 몇몇 종친이 솔선 거액을 표성함으로써 재건사업 추진에 크나 큰 활력소가 되었다.
이후 부산 화목회(和陸會)와 각 지역의 종친회 등에서 재건사업의 진척과정이 설명되고 거족적인 위선의 정열로 굳게 뭉쳐 이 사업을 기필코 완성할 것을 결의하였고,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취지문이 발표되자 전국 및 일본 지역의 종친들의 열화같은 참여로 표성금이 헌납되기 시작하여 1982년 7월부터 날이 갈수록 계속 들어와 1985년 연말에는 최종적으로 1억 664 만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고성이씨의 오랜 소원인 금봉재 재건사업이 드디어 시작되어 1983년 5월10일 정오 금봉재 현지에서 기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본채가 착공 3개윌 여 만에 상량식을 올리게 되었다. 기공식이 거행된 이래 계속된 일기불순에다 무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도 제반 절차와 기초공사 등에 이르기까지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공정을 추진해 1983년 8월14일 상량식을 거행하였고, 기공식 이후 1년만인 1984년 4월15일 드디어 완공하게 되었다.
우리 고성이씨도 ‘하면 되다.’ 는 자신감과 커다란 저력(底力)이 깊이 깔려 있었으며 따라서 금봉재 재건은 역사적 큰 일로써 총 8천여만원이라는 공사비는 전 종친의 피와 땀의 결정(結晶) 이었다.
금봉재 본채가 완공된 후에 동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사암공파 33세 송준(松俊) 종친이 협찬한 1,600만원의 예산으로 동년 11월26일에 완공하였으며, 당초 금봉재 및 시조 이하 5세위 설단 건립비만이 조성되었던 여건하에서 투철한 위선정신을 발휘한 종친들의 덕으로 금봉재 뜰에 세워진 동재는 금상첨화를 이루어 본재의 모습을 더욱 웅장하게 하였으며 이와 같이 끊임없는 정성어린 종친의 위선심은 타성(他姓)이 부럽지 않은 고성이씨의 긍지를 갖게 하였다.
금봉재 본재 건립공사와 아울러 여러 부속건물을 신축하였는데 대문을 3간으로 신축하여 명실 공히 정문으로 우뚝 솟아 그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며 또 대문의 왼쪽 옆에 화장실을 신축함으로써 금봉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주고, 재실 주위 외곽의 담장을 수리하여 아담한 재실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3) 금봉재 중건에 관련된 각종 기문


1985년 6월18일 고성이써 대종회는 대전 경안빌딩 내 대종회장실에서 회장단회의를 열고 금봉재 재건사업에 표성한 내역을 비석으로 건립하기로 하고 그 문건(文件)을 심의 채택하여 1985년 5월 금봉재 뜰에 아름답게 건립하여 후손 만대에 그 공적을 남겼다.
대종회에서는 금봉재 중건기를 월성 정동휘 선생에게 부탁해 기문을 지어 제작하여 금봉재 대청에 현판으로 제작하여 중건기와 나란히 게시하였다.

(4). 금봉재 보수 및 기타 공사


1). 금봉재 누수보수공사


1984년에 준공한 금봉재 본채가 1986년 여름장마로 인하여 비가 새어 대종회에서 논의한 끝에 1987년 7월에 본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 2차로 기와 잇기와 도색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누수는 계속되어 1993년에는 다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여 완전하게 마무리지었다.

2). 금봉재 진입로 완성


우리 고성이씨의 숙원사업인 금봉재 재건을 하기 위해서는 소로인 진입로 확장이 우선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고성문중 종친들이 단결하여 10여 일에 걸쳐서 진행한 결과 1980년 11월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도로를 완성하였다.
그후 고성종친회는 고성군에 특별히 교섭하여 지원금을 받아 80M를 확장 및 포장하여 각종 차량이 편리하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3) 금봉재 주변 조경 식수


금봉재 재건과 시조 이하 5세위 단소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정성을 쏟아가는 가운데 주변 조경 문제가 자연히 거론되어 재실 경내와 단소 주위, 묘소 그리고 진입로 등에 많은 조경용 나무가 필요하였다.
이에 경북 경산에서 삼원상사를 경영하는 鎬基 종친은 단소 경내 조경용수 1트럭분을 기증하여 1984년 3월에 식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부산의 龍文 종친도 조경수 250주를 직접 운반해 와서 금봉재 주변에 식수하였다. 그리고 창원의 德烈 종친은 금봉재 미화를 위해 1989년 3월26일 많은 조경수를 기증해오므로 고성종친회 회원 30여명이 포크레인 한 대를 이용해 묘소 아래쪽을 말끔히 정리하고 식수작업을 하였고 1999년 3월29일에는 국무총리 漢東종친이 조경수를 보내와 금봉재 일원과 단소 주변에 식수 조경하였다.

4) 고성 선산 입로표석 설치


1994년 초봄부터 거론해 오던 금봉산 선산 입로 표지석을 鍾聲 대종회장의 성금으로 그해 10월27일 완성하였으며, 6자 대형 자연석으로 한 눈에 볼 수 있어 이 표석으로 선산의 면모가 한층 새로워 졌다.
그 후 1998년 3월29일 대종회 이사회에서 입로 표석의 글자 “鐵城” 을 “固城(鐵城)” 으로 고쳐 제작하여 세울 것을 결의하고 이 해 9월 5일 현재와 같이 수정 정비하여 다시 세웠다.

5) 주차장 설치


금봉재의 재건, 선세 단소 개설, 文山公 묘소 정비 등의 사업이 마무리 됨에 따라 경향 각지 종친회에서 단체로 또는 개인적으로 웅곡의 사적지(事蹟地)를 탐방하는 인원이 해가 거듭할수록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승용차를 이용해 내방하는 수도 늘어나서 주차장의 설치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종회에서는 재실 앞의 공지에 주차장 부지를 확보하고 1984년 그 일부에 자갈을 깔아 주차할 수 있게 하여 오다가 1997년 9월에는 340평으로 확장하였으며 2002년 4윌에는 다시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5세 5위 단소 개설


1) 5세5위 단소의 최초 설단


우리 고성이씨 족보 병오보의 5세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 휘 인충(麟冲)의 세덕란에는 “以上墓在河東云未詳(이상 5세위의 묘는 경남 하동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시조부터 5世까지의 묘는 실전(失傳)한 지 이미 오래된 일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고종 38년(1901) 무렵, 당시의 어른들이 종론(宗論)[그 때 왕묘동 설단에 관한 통문이 진주의 진(珒), 청안의 종덕(鍾德), 서천의 기주(基周) 등 세분이 연명으로 낸 바 있었음]으로 뜻를 모아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 왕묘동 소재 7世 문희공(文僖公) 묘소 국내 오른쪽에 선세 5世위의 단을 이룩하여 세향을 받들었다.

2) 5세 5위 단소의 재설(再設)


그 후 1957년에 6世 文山公의 묘소가 있는 고성군 웅곡 금봉재 옆에 단소를 다시 설치하여 봉제(奉祭) 해 왔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단은 비바람에 깍이고 낡아 그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3) 5世 6位 단소 설단(設壇)


1980년 10월5일 대종회 총회에서 금봉재 재건 및 시조이하 5世6位의 설단을 추진하자는 종의가 가결되었으며, 그 후 문산공의 묘재인 금봉재를 재건하면서 같은 국내 백호등(白虎嶝)의 기슭에 기지(基地)를 새로이 마련하고 5世 검교문하좌시중(檢校門下左侍中) 휘 엄춤(嚴冲) 位를 추가한 5世6位 제단을 소목(昭穆,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규정)의 차례대로 설단하기로 하였다.
재일 교포(僑胞)인 승노(承魯, 29世, 참판공파, 청도군 이서면 상대곡리 출신) 종친이 해외에서 못다한 위선을 해봐야겠다고 하며 위의 단소를 단독으로 건립키로 하면서 일금 2.000 만원을 표성하였다.
본 사업은 1983년 5월 제반 수속 절차를 마치고 7월부터 기지(基地) 정지공사, 석축(石築), 보도(步道) 공사 등 단대(壇垈) 조성에 착공하여 비석 9주, 상석 6대, 석등 1개, 장군석 한 쌍, 사자석 1쌍, 내계석(內階石), 계단석(階段石), 세단비(世壇碑) 설치와 비석 갈기, 각자(刻字), 서역(書役) 등의 공정을 거쳐 1984년 6월1일 완공하고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이와 같은 사업 규모는 타성의 설단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가장 크고 장엄한 것이니 참으로 자랑스럽다. 또 이 사업을 완성시키기까지 오로지 투철한 숭조정신에 입각한 헌신적 노고가 깔려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화합하여 위선 사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종족임을 자부하면서 숭조사상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6). 文山公• 文憲公 묘소의 수복(修復)


文山公의 14세손 휘 하상(夏相, 사암공의 7대손)이 진주 영장(營將, 진영의 으뜸)으로 부임하여 선세(先世) 3묘에 참배한 후 공이 서거한 지 400년인 숙종10년(1684) 9월에 묘소를 사초(沙草) 하고 허물어진 묘비를 외후손인 경상도 관찰사 서문중(徐文重, 涵齋 徐嶰의 현손, 大提學, 領相)이 글을 짓고, 외후손 고성 현령 이필무(李必茂)의 글씨로 세웠다.
이러한 위선 사업을 위해서 고성을 비롯한 경상도지방의 문증 대표들이 종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때 결의된 내용은 고성이씨대종회 발전사(2004년 10월31일 발행) 181~183면에 수록되어 있다.
그 후 두 묘소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초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를 항상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오던 중 청도에 사는 종성(鍾聲, 28세 참판공파) 종친이 위선 사업하는 것이 소망이라면서 묘소가 무너져 초라한 것을 그대로 두고 기다릴 수 없어서 1984년 7월부터 9월까지 고희(古稀) 향연 경비를 투입하여 선조 3묘에 사초함으로서 많은 종친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족의(族誼)의 돈후(敦厚)한 정신은 우리가 본받아 다같이 종사에 헌신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1984년 10월에 건립한 묘비는 묘소 동쪽 아래에 있다.

(7). 행촌•도촌•시중공의 단소


행촌공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 대덕산 자좌에 있으며 배위와 합폄이고 지금은 휴전선 비무장지대 판문점 근처이다. 묘전에 비석이 있고 문인석이 한 쌍이 있다. 묘향은 음력 10월15일에 모셔왔으나 광복후에는 묘소가 휴전선 북쪽에 있어 올리지 못하고 1991년 고성 금봉재 옆에 단소를 마련하여 단향을 올리고 있다.
도촌공 내외분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서재리 대사현 계좌에 상하분으로 모셔져 있는데 지금은 북한에 속해 있다.
묘향은 음력 10월15일에 모셔왔으나 광복후에는 묘소가 휴전선 북쪽에 있어 올리지 못하고 후손들이 1968년 윤7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 화암산 가목현의 언덕 묘좌에 설단하여 묘향을 대신하여 단향을 받들어 오다가 1991년에 백씨인 행촌공 단소옆에 단소를 마련하여 단향을 올리고 있다.
10세 시중공 휘 임(琳)의 묘소는 충주 경제원 남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되었기 때문에 공의 9대손인 창주공 휘 성길(成吉)의 후손 문중에서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 화암하에 양위를 합설하고 단향을 묘셔오다가 1999년 12월 도촌공 종중에서 공의 찬연한 사적과 숭고한 충절을 만천하에 알리어 세인의 귀감이 되고자 하여 성금을 모아서 고성 금봉재 서편에 사적비를 세우고 그 옆에 단소를 마련하여 묘향을 받들고 있다.

(8). 금봉재 식당 건립


1983년에 시조로부터 5세6위의 단소 개설, 문산•문헌공 묘소 단장 및 행촌•도촌공 제단비 설치, 시중공 휘 림(琳)의 사적비와 제단을 새로 마련함과 동시에 금봉재를 웅장하게 중건한 후로, 특히 선세 묘향시에는 200명을 넘는 종친이 대거 참석함으로서 음식 접대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여러해 동안 진행부서에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1996년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새로이 선출된 찬(璨, 30世 안정공파) 신임 대종회장께서 주관하여 4,460만원의 표성금으로 1997년 여름에 공사에 착수하여 금봉재 영역내 대문 동편에 최대로 신축할 수 있는 면적인 20평의 식당을 묘향전인 10월30일에 준공하고 음식준비나 조리대, 식탁배치, 뒤처리 등에 편리하게 실내 배치를 마무리 하였다.
식당 신축에 소요된 예산은 2,700만원 이었으며, 식당내 집기류를 구비하고 남은 표성금은 대문 밖의 주차장을 확장 정비하여 금봉재 주변 환경미화 및 조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9). 금봉재 관리사 개축


1997년 10월에 회화면 웅곡(곰실) 금봉재 주변에는 최근 15년 동안 위선정화 사업이 마무리됨으로서 많은 후손들의 긍지 또한 대단하였다. 그러나 옥에 티와 같이 금봉재 앞의 관리사가 초라하여 마을 입구에서 금봉산을 바라볼 때 항상 섭섭한 마음이 앞서서 모두가 걱정을 하던 차에 1999년부터 대종회에서 추진 해오던 족보(辛巳譜) 발간을 성공리에 마침으로서 그 잉여금 중 일부를 할애하여 초라했던 관리사를 새로 짓기로 의견을 모았다.
금봉재 주변의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서는 당시의 관리사를 동쪽으로 얼마간을 이동하고 주차장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우고, 임야 118,017m² 중 854m² 를 형질변경하고 관리용 주택 철근스라브조 73.80m² (22.36평), 창고 철근스라브조 39.90m²(12.09평)을 짓기로 한 설계도를 확정하고 공개입찰로 시공업자를 선정하여 73,146,200을 투입하여 2002년 4윌11일에 시작하여 7월11일까지 완공하였다.
이때 관리사를 옮겨서 신축한 관계로 넓어진 주차장을 다시 정비하고 아울러 금봉재 안에 위치한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전환하는 공사도 함께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