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유허

일가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웃음소리가 창밖까지 번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고성유허(固城遺墟)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서외동 145번지에는 공부상 고성이씨 대종회 명의로 소유권 등기가 되어 있는 대지 698평의 땅이 있는 바, 우리는 이곳을 고성이씨 유허(遺墟, 발상지로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라고 부르고 있다.
이 터전은 저 멀리 북쪽에 높이 솟은 천왕산의 우람한 기상을 이어 받았으며 좌우로 뻗어 내려온 산들은 여기를 겹겹으로 감싸고 안산(案山, 터전 맞은편에 있으면서 그 터전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여기는 산)은 낮은 뫼 솟은 봉우리가 첩첩으로 어울려서 원근의 절묘한 변화를 이루었으며 또 한쪽에는 바다로 이어진 긴 만(灣)이 와 닿았으니 이 대자연의 조화는 실로 절묘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고성군지(固城郡誌)인 철성지(鐵城誌)와 고성이씨 족보, 행촌실기(杏村實紀), 철성문고(鐵城文庫) 등에 기 재된 내용에 따르면 시조공 휘 황(璜)께서 원래는 송도 송악산 아래에 사시다가 철령군(鐵嶺君)이라는 군호(君號)를 받으시고 고성 자보포(玆保浦)로 옮겨 사셨다는 기록이 있고, 3世 경안공(景安公) 휘 국헌(國軒) 께서 일찌기 고성 문소산에 들어가시어 글을 읽으시고 시를 읊으셨다고 하고, 문소산에서 읊으신 시 한 수가 전래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효성이 지극하신 6세 문산공(文山公) 휘 진(瑨)께서는 청규중덕(淸規重德, 나라에 관한 규칙을 잘 지키고 도덕을 중요시 함)과 직절영명(直節令名, 곧은 절개를 가졌음으로 훌륭하다는 명성)을 기리던 왕의 특별한 요청도 사양하고 부모님(휘 인충)을 모시고 문소산에 은거(隱居)하셨다는 기록이 있고 6세 문산공(文山公)과 8세 문헌공(文憲公) 내외분의 묘소가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 웅곡(熊谷)에 모셔져 있는데, 목민관(牧民官, 고을 수령)으로 계실 때에는 이르는 곳마다 인애(仁愛)의 덕업(德業)을 남기시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지내셨으니 고성이 배출한 고려의 명현들이었다.

행촌공 유허비문에 따르면 “금 송곡좌우토전산택 개기채식야(今 松谷左右土田山澤 皆其采食也)”, “고성현치서문외 송곡전임해안 유선생고택기지(固城縣治西門外 松谷前臨海岸 有先生故宅基址) 거민전설 선생세거 생장지지야(居民傳說 先生世居 生長之地也)”라고 되어있으며, 또한 야로당일집(野老堂逸集)의 “선조시거 고성현서문외 기후입송도이한양(先祖始居固城縣西門外 其後入松都移漢陽)”이란 글의 뜻을 새겨보아 송곡 좌우의 땅과 밭, 그리고 못과 해안이 모두 우리선조의 채식지(采食地, 관직에 따라 하사한 토지)임이 분명하고, 그 옛날 야로당(野老堂) 휘 순(淳 17세 둔재공파)께서 통영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이곳 유허(遺墟)와 자보포(玆保浦)‧웅곡(熊谷)에 있는 선영(先瑩)의 보존관리를 당부한 일도 있으나 그 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채식지 대부분을 망실하고 그 많았던 토전산택(土田山澤) 가운데 이제는 대지 698평의 땅만이 선조 유허로 남아 내려오고 있는바 그 땅 마저 황폐된 채 방치하고 있었다.

고성읍 송수동에 있는 행촌‧도촌 두 선조의 태지(胎地)인 유허지는 우리선조의 세거지로서 우리에게는 이곳이 마음의 고향이자 우리 씨족의 발상지이다. 이 유허(遺墟)는 우리 선세(先世)의 여러 명현들이 학문을 닦고 덕성을 길러 장차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앞날을 꿈꾸시던 높은 정신이 깃들어 있는 거룩한 성지(聖地) 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곳을 훌륭하게 보존하고 그 정신을 뜻깊게 받들어야 할 사명을 지녔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수호에도 험난한 곡절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최근까지 겨우 대지(垈地)만 소적(簫寂,쓸쓸하고 호젓함)한 모양으로 보존되어 왔었다. 진실로 망극(罔極)하기 짝이 없었다.
고성읍 송수동에 있는 행촌‧도촌 두 선조의 태지는 옛부터 용헌공(容幹公)의 종가소유로 되어 있었다. 목은 이색 선생이 지은 행촌(杏村) 신도비문에 의하면 공민왕이 행촌공(杏村公)의 위대한 공덕을 사모하여 화상을 그리게 하여 행촌공의 아들 평재공(平齋公)에게 전하고 붕주(朋酒)를 하사하면서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니 평재공이 읍사하고 봉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촌‧도촌 양 선조의 태지는 용헌 종가에서 관리해 왔고 종손 이응(李應)의 명의로 등기부에 등록되어 있다가 일제말기에 고성 금봉재 종중으로 이전하였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고성인 몇 사람이 사적으로 천리교인에게 그 태지를 대여하여 거창한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종중에서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종론으로 철거를 요구하니 천리교측에서는 현행법으로 건물의 가격이 토지가격보다 많으니 태지를 양도하라 하면서 철거를 거부하였다. 그에 대하여 이영기(27세, 참판공파) 부산지방검찰청 검사가 이에 대항하여 노력하고 처음으로 조직하여 선출된 고 이승옥(李承玉, 29세 참판공파) 대종회장과 당시 고성종친회장이었던 이극성(李極星, 28세 사암공파) 종친의 희생으로 교회당을 자진 철거하도록 하여 조상의 유지(遺址)를 완전히 복구 하였다.

2. 유허(遺墟) 성역화(聖域化)


그런데 그 뒤에도 유허지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그 곳에 여러 민가가 들어서고 가건물이 세워진 채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가을 경 서울종친회 산하 등산회에서 고성 선조유적지순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고성유허지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라는 여론을 환기시키게 되었다. 여론이 확산되자 대종회에서는 각 지역 종친회 회장(33명) 및 대종회 대의원(32명) 연석회의를 소집하였다. 1988년 12월18일 오전 11시 고성읍 라이온즈 회관에서 48명의 지역 종친회장 및 대종회 대의원 등이 참석하여 유허지 현장을 답사한 후 진지하게 회의를 진행하였다. 현장 답사에서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후손으로서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으며 그곳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데 공감하고 고성유허지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추진위원장에는 이영기 종친이 추대되고 전국 작 지역종친회 회장 및 대종회 전국 대의원이 당연직 추진위원이 되어 유기적이고 효과적인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기구를 구성하였습니다,
임원으로는 추진위원장, 고문(전‧현직 대종회장), 추진위원(대종회 부회장 및 대의원), 감사, 집행위원장(이극성 고성종친회장), 실무 집행위원(이광열, 이갑열, 이준기, 이원희) 등 인선작업을 마무리 하였다.

3. 사업경비 모금


성역화에 소요될 예산을 편성하고 지역별로 분담금으로 배정하여 성공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지역 분담금액 지역 분담금액 지역 분담금액 지역 분담금액
서울 1,500만원 대전 300만원 대구 700만원 부산 1,000만원
광주 100만원 수원 100만원 성남 100만원 서천 20만원
전북 50만원 포천 200만원 고성 300만원 울산 100만원
마산 100만원 충무 100만원 창녕 30만원 진양 100만원
성주 50만원 태안 20만원 경산 50만원 제주 30만원
청도 300만원 풍기 20만원 안동 200만원 춘천 50만원
논산 20만원 경주 20만원 상주 30만원 파주 30만원
밀양 100만원 연기 20만원 청주 50만원 김해 30만원
합천 20만원 비래 20만원 총합계금 5,850만원


4. 성역화 사업 준공


전국적으로 성금을 찬조받고 용헌종중으로부터 거액을 희사받아 약 3억여 원의 자금을 확보하고 영기 위원장을 비롯하여 고성 현지 문로 극성(極星), 평열(平烈), 갑열(甲烈), 광열(洸烈), 종욱(鍾彧), 진주의 인기(仁基), 마산의 덕열(德烈), 전주의 세환(世煥), 대구의 시화(時和), 승열(承烈), 서울의 준기(準基), 원희(元羲) 등 여러 실무 위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힘입어 현지에 “고성이씨 선세유허비”를 건립하고 “행·도촌유허비”도 그곳으로 이건(移建) 하여 비각(碑閣)을 새로 짓는 등 유허성역화 사업을 끝마쳤다.
유허성역화사업을 더욱 더 훌륭하게 마무리하기 위하여 영기 위원장과 실무위원 준기 광열 덕열 평열 등은 양촌(陽村) 권근(權近) 사당을 비롯하여 경주, 하동, 거창, 고령, 진주 등지를 순회하며 여러 타성 문중이 가꾸어 놓은 유허성역화 현지를 답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93년 11월 15일 오후 3시 정각 고성유허지 현지에서 500여 명의 내빈과 종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옛날 선조들이 유거수덕(幽居修德, 조용하게 학덕을 닦음)하시던 사적(史蹟)을 조명하고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인 이 옛터를 성역화 하였으니 앞으로 단합된 종론으로 길이길이 보전하도록 우리 모두가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5. 새로 건립한 철성이씨 선세유허비문(鐵城李氏先世遺墟碑文)


유구(悠久)한 세월을 두고 서기영롱(瑞氣玲瓏)한 이곳 고성 서문 밖 송곡촌에 산해(山海)의 정수(精粹) 어울러진 터전이 있으니, 여기가 바로 철성이씨 선세의 유허(遺墟) 이다. 저 북쪽에는 천왕산이 높이 솟아있고, 앞에는 큰 바다로 이어진 긴 만(灣)이 들어와 있다, 그 좌우에는 다시 겹겹으로 뻗어 내린 구릉들이 감쌌고, 안산은 낮은 뫼 솟은 봉우리가 첩첩이 늘어서서 절묘한 변화를 이루었으니 이 울안을 둘러싼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신기롭기만 하다.
그 옛날 고려 초엽에 시조 휘 황(璜)께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철령군(鐵嶺君)의 군호(君號)를 받으시고 이 고을에서 후손들의 영원한 근본을 여시었다. 그 후 대대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배출되고 학문과 덕업(德業)은 면면(綿綿)히 이어졌다. 따라서 선대의 세덕을 대강 살펴보건데, 2世 휘 전지(田技)께서는 태자첨사(太子詹事)들 지내셨고, 3世 경안공(景安公) 휘 국헌(國軒)께서는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오르셨다. 4世 휘 영년(永年)께서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셨고, 5世 휘 인충(麟冲)께서도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오르셨으며 公의 제씨 휘 엄충(嚴冲)께서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 되시었다.
6세 문산공(文山公) 휘 진(瑨)께서는 일찍 승문학사(承文學士)가 되시었으나, 권간(權奸, 권세를 가진 간신배)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므로 관직을 버리시고 문소산에서 시문(詩文)을 벗삼으며 지절(志節)을 굳게하셨다. 그 후 원종께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거듭 부르셨지마는 끝내 사양하시니 왕께서는 칙명(勅命)으로 절사(節士)의 호(號)를 내리시고 公께서 사시는 곳을 정표(旌表, 어진 행실을 칭송하고 이를 널리 알림) 하시었다. 그리고 公의 지극하신 효성은 사기(史記)에서 기리고 있다.
7世 문회공(文喜公) 휘 존비(尊庇)께서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涉獵)하시어 문망(文望)이 높으셨고, 일찌기 서연(書筵)에서 자주부강책(自主富强策)을 논하셨다. 충렬왕 6년에는 비위오사(備委五事)를 계진(啓陳)하시었고 일본을 정토할 때 삼남도 도순문사(三南道 都巡問使)가 되시어 큰 공을 세우셨으며 10년에는 왕께서 원나라에 가실 때 감찰대부(監察大夫), 세자원빈(世子元嬪),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국정의 유진기무(留鎭機務)를 맡게 하시니 섭정(攝政) 3년에 나라가 태평함을 이루었다. 충렬왕 13년에 서거하시니 왕께서는 통탄하서며 왕의 예로 형강위 산사리에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동명을 왕묘동이라 부르게 하시었다.
8세 문헌공(文憲公) 휘 우(瑀)께서는 문하시중 (門下侍中)을 지내시고, 그 문장과 덕행은 해동명선(海東名選)에 전해지고 있다. 公의 제씨 휘 정(精, 법명 復丘)께서는 득도(得道)하신 후 법기(法器, 불도를 능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로 대성하시니 충정‧공민 두 왕조에서 왕사(士師)로 책봉되시고 법호(法號)를 왕사 대조계종사(王師大曹溪宗) 걱엄존자(覺儼尊者)라 하시었다. 입적(入寂) 후 왕이 시호를 각진국사(覺眞國師)라 하고 탑액(塔額)을 자운(紫雲)이라 하사(下賜)하였으며 국사(國師)의 법계(法系)를 이은 고승(高僧)이 천 여명에 이르렀다.
9세 문정공(文貞公) 휘 암(嵒)께서는 충숙왕 10년에 간신들이 고려의 국호를 폐지하려 책동하니 홀로 환단(桓檀) 이래의 민족적 자주성을 설파(說破)하시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국호(國號)를 보존케 하시었다. 14년에는 청평산 문수사 장경비를 쓰셨으니, 그 두전(頭篆, 앞면의 篆書体)은 신품(神品)이요, 행서(行書) 또한 당대의 명작이며 그 밖에 진초(眞草)의 필법(筆法)이 절묘하였다. 충정왕 원년에는 왕명으로 국무를 청단(聽斷)하시었고, 곧 좌정승이 되시었으며, 공민왕 7년에는 문하시중(門下待中)에 오르셨다. 그 뒤 몇 차례 홍건적이 침범하니,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시어, 국란극복(國難克服)에 진충갈력(盡忠竭力) 하시었다. 난이 평정됨에 왕께서 공신호(功臣號)를 내리시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을 봉하셨으며, 고성군 송곡리 좌우의 토전(土田)과 산택(山澤)을 채읍(采邑)으로 내려주셨다. 그리고 구국부민(救國扶民)의 정신으로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농상집요(農桑輯要)와 태백진훈(太白眞訓) 등 백세불후(百世不朽)의 행촌삼서(杏村三書)를 저술하시었다. 公의 제씨 문열공(文烈公) 휘 교(嶠)께서는 형부상서(刑部尙書)와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오르셨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은 행촌공과 더불어 세상에 널리 얄려졌다.
이 처럼 선세 누대로 사시던 옛터에서 혹은 지절(志節)을 지키시고, 혹은 위훈을 세우시고, 혹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경륜(經綸)을 펴신 명현(名賢)들이 잇달아 나시었으니, 그 찬연한 의적(懿績)들은 청사(靑史) 에 길이 빛나고 있다. 여기 송곡촌의 유허(遺虛)는 실로 성미(盛美)하다. 이 옛터는 시조께서 조기(肇基, 기초를 확립함)하신 이래, 대대로 높은 정신이 깃들어 있는 거룩한 땅이다. 후손들은 마땅히 이 성역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그 정신을 영광스럽게 받들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옛터는 동방에 웅비하시던 선조의 요람이고 그 뜻을 이어나갈 후손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이제 새롭게 단장한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워 천년고기(千年古基)의 유서(由緖)를 밝히고 이를 자손 만대에 길이 전한다.
서기 1993년 11월 유허정화위원회 짓고
일중 김충현 정면 쓰고, 후손 원희 뒷면 쓰다.

6. 이건된 행촌공 도촌공의 유허비(경남도 문화재 제219호)


1) 문정공 행촌 이선생의 유허비문(번역문)


철령(鐵嶺) 서문 밖에 한 마을이 있으니 송곡 이다. 북으로는 천왕을 이고 남으로는 바다를 당기고 가운데 한 구역을 감추고 있으니, 그 빙 둘러친 모양세가 엄연하여 마치 조정에서 노련한 재상이 백관을 통솔하고 임금을 돕는 것과도 같고, 또 대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지휘함에 법도가 있어 보루 같으며 부대가 문란하지 않고 질서정연한 것과도 같다. 이 마을이 바로 우리 문정공 선생이 살던 곳이라 한다.
살펴보건데, 현릉(玄陸) 1359년 겨울, 홍건적 수십만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서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조정에서 누구를 원수로 뽑을 것인지 의논하였는데 모두들 “시경(詩經)을 좋아하고 예(禮)를 중시하니 오직 李 시중이 적임자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선생은 세 조정을 거친 원로대신으로 초야에 은퇴해 있었다. 왕이 내신을 보내어 기용하였고, 이에 공이 밤을 낮 삼아 말을 달려 진지에 도달하니 우리 군사는 아직 다 모이지 않았는데 적의 기세는 창궐하고 있었다. 서경의 관리들이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면서 창고를 불태우자고 하였다. 행촌 선생은 “옳은 계책이 아니다. 적이 먼길을 달려와 싸우자고 하니 그 날카로운 예봉을 감당할 수 없다. 중도에 그치도록 하지 않으면 그 기세가 반드시 우리 국도(國都)를 뒤흔들 것이다. 차라리 이 성을 먹이로 주면서 창고를 잠가두고 동쪽으로 달아나면 적이 우리를 겁쟁이로 여기고 또한 잠시 머물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지고 잠시 머물다 보면 기세가 줄어들 터이고, 그 동안 우리 군사가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한번 북을 울리고 습격하면 다시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을 패퇴시켰다.
이듬해 남쪽 지방으로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갔을 때 총병 정세운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평안하면 재상감에 주의하고 위태하면 장수감에 주의한다는데, 나는 유신(儒臣)이라 나약하여 군무를 잘 보지 못하니 그대가 힘써주시구려” 하였다.
적이 평정되고 논공행상 할 때 행촌공이 제일의 공을 차지하자 이에 임금을 대면하여 아뢰기를 “지금 불행히도 이렇게 변고가 많은 때를 만났으니 장군이나 재상에 인재가 필요합니다. 신이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좌상의 자리에 오래 앉았으니 현능(賢能)한 이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더욱 가상히 여겨 공신의 호를 하사하고 철성군에 봉했으니, 지금 송곡동 좌우의 토지며 산, 못 등이 모두 그의 채읍지 이다. 거룩하고 성대하도다! 선생은 바다와 산악의 기운을 모아 받아 태어났고, 바다와 산악은 선생을 만나서 그 이름이 드러난 즉 이른바 땅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빼어나게 된다는 것이로다.
하루는 후손 진(珒) ·무(珷) ·상회(象羲) 등이 실기 한권을 가지고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선조의 외루지축(畏壘之祝, 사당을 지어 제사를 받든다는 뜻)이 갈천에 있었는데 나라의 금법(禁法)에 걸려 문득 훼철(毁撤)되었으므로 그 유허지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합니다. 이로써 비명(碑銘)을 지어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그 책을 읽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비범하였고 소학을 배우면서 뜻을 깊고도 넓게 꿰뚫었으며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더욱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독실하였다. 필법은 조자앙과 서로 겨룰 정도이고 문장은 고고(高古) 하고 간결하여 원나라 학사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집안에 있을 때는 살림의 형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백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근면 신중하고 법도를 지켜 늘 분수에 차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고서야 벼슬에 나아갔고 한 차례 사직하고는 물러났다.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을 때 내려진 성지(聖旨)에 “성균관은 사도(師道)가 있는 곳이라 그 임무 또한 무겁다. 그러나 나의 다스림을 돕는 일을 양부(兩府)가 오로지 맡고 있다.” 하였다.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을 때 국정을 맏아서 처결하라는 명을 받았고, 환국하여서는 곧 “선왕의 옛 신하중 오직 이암이 덕이 있어 나의 정치를 보좌할 만하다”라는 성지(聖旨)가 있었다.
공거(貢擧, 인사담당관)를 맡았을 때 인재 선발이 적절하였기 때문에 문생(門生)들 중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전형(銓衡, 과거시험으로 인재 선발)의 일을 맡았을 때 인재 선발에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추밀(樞密)에 있을 때 집권자가 우리 유가(儒家)를 헐뜻었는데 공이 홀로 널리 바로잡고 구제하여 사문(斯文)이 이에 힘입었다. 서쪽을 정벌할 때 비술(秘術)로 적을 깨뜨릴 수 있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군사들의 마음을 혼란시킨다 하여 그를 잡아서 도성으로 보냈다. 나이 예순에 사직하고 물러나면서 “나는 이미 늙어 관직을 감당할 수도 없고 언책(言責)도 없으니 응당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일을 삼아야겠다” 하고 손수 서경 태갑편을 써서 왕을 간(諫)하였으며 또 일찌기 농사를 짓고 재물을 불리는 방법을 종류별로 모아서 농상집요를 편찬하였으니, 역시 무일편(無逸篇, 게으름을 경계하는 뜻)에서 경계한 뜻인 것이다.
내가 읽기를 마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니다. 아나다. 선생의 이름은 금석(金石)에 남아있고 자적은 사책(史冊)에 남아있으니, 한 조각 비석이 있고 없음이 선생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그러고 내가 듣건대 “한 사람의 뼈가 수레 하나에 가득 차면 방풍씨(크고 많다는 뜻) 인 줄 알겠다” 하였으니, 그 크기가 수레만 하다면 문정공행촌이선생유허(文貞公杏村李先生遺墟)로 족할 터이니, 어찌 글로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세계(世系)와 이력(履歷), 종파(宗派)의 나뉨은 기재하지 않아서는 안되겠기에 드디어 참람됨을 잊고 서술한다.
세계(世系)는 이러하다. 철성이씨는 호부상서 휘 황을 시조로 삼고 그 후손으로 휘 진이란 분이 있었는데 승문학사로서 원나라의 압제를 받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으면서 자호를 문산도인이라 하였다. 원종이 칙명으로 절사(節士)란 호 두 자를 덧붙여주었다. 이 분이 휘 존비를 낳았으니 유술(儒術)로 충열왕을 섬겨 벼슬이 판밀직에 이르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이 분이 휘 우를 낳았으니 문하시중 철성군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 분이 함양군 박지량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경릉 정유년(1297)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휘는 암이요 행촌은 그 호이다.
이력(履歷)은 이러하다. 나이 17세에 계축년의 과거에 급제하였고, 의릉(毅陵)이 그 재능을 아끼어 부인(符印)을 맡는 자리에 임명하고 비서실의 교감(校勘)을 제수 하였으며, 이윽고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신미년에는 전의령(典儀令)으로서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 • 감찰집의(監察執義)로 발탁되었고, 경진년에는 지신사(知申事)·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로 옮겼다. 공은 전후로 지공거(知貢擧)가 된 것이 세 차례이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된 것이 두 차례였다. 을유년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제수되었고 기축년에는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좌정승(左政丞)에 배수되고 공훈이 기록되었다. 임진년에는 부친을 이어 철원군(鐵原君)에 습봉(襲封)되었다. 계사년에 사직 은퇴하였고, 무술년에 다시 시중(侍中)이 되었고, 기해년에 도원수에 임명 되었고, 신축년에 임금을 호위하여 복주로 갔고, 임인년에 치사(致仕)히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계묘년에는 호종공신 일등으로 책훈되고 공신각에 화상(畵像)이 올랐으며, “추성수의 동덕찬화 익조공신” 이란 호가 하사되었다. 갑진년 5월에 졸(卒)하니, 유사를 보내어 예로써 장사하였으며 태상(太尙)에서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그 이듬해 왕이 친히 공의 초상화를 그리고 사제(賜祭)하고 충정왕의 사당에 배향케 하였다.
종파(宗派)는 이러하다. 아들은 넷인데 인(寅)은 문하평리(門下評理), 고성군이요, 숭(崇)은 侍中으로 시호는 안정(安靖)이며, 음(蔭)은 모적(毛賊)을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상장군(上將軍)에 배수되었고 신축년 겨울에 전몰(戰歿) 하였으며, 강(岡)은 대제학(大提學)이요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딸은 둘인데 판사 김광우 (金光雨)와 부사(府使) 조선(趙愼)에게 각각 시집갔다. 인(寅)의 아들 길상(吉祥)은 부사(府使)이고 문자(文資)는 전서(典書)이다. 숭(崇)의 아들 민(岷)은 판윤(判尹)이고, 인(嶙)은 사재감(司宰監)이고, 치(峙)는 부사(府使)이고 연수(延壽)는 소윤(小尹)이다. 딸은 주지사(州知事) 최안준(崔安濬), 시호 평도(平度)이고 참찬(叅贊)인 최유경(崔有慶), 시호 문충(文忠)이고 영의정인 조준(趙浚)과 봉예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각각 시집갔다. 음(蔭)의 빈(彬)은 밀직반주(密直班主)이다. 강(岡)의 아들 원(原)은 좌의정(左議政)·철성군(鐵城君)이고 시호가 양헌(襄憲)이다. 딸은 시호 문충(文忠)이며 좌찬성인 권근과 도평의(都平議) 한양군(漢陽君)인 민개(閔開)와 군사(軍事) 이량간(李良幹)에게 각각 시집갔다. 증손 현손 이하로도 대대로 명성과 덕망을 갖춘 이들이 있었으니, 이를테면 승지 대(臺), 좌윤 질(垤), 현감 증(增), 사간(司諫) 지(墀), 참판이며 시호 정숙(貞肅)인 칙(則), 유수(留守) 굉(浤), 좌랑(佐郞) 명(洺), 참판이며 시호 문광(文光)인 육(陸), 참의(叅議) 맥(陌), 부제학(副提學) 윤(胤), 정언(正言) 주(冑), 수찬(修撰) 여(膂) 들은 절행(節行)과 사업이 국사에 빛나고 있으니 이러한 훌륭한 자손들이 많아 이루 다 수록할 수 없다. 공의 아우 교(嶠)는 호가 도촌(桃村)으로 문장과 덕업(德業)이 公과 백중(伯仲)을 겨룰만 하다.
명(銘)에 이르되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어(天眷大東) 득별히 문정공을 낳으시니(篤生文貞) 온축(蘊蓄, 지식이나 학문을 깊이 쌓음)한 문장 왕업을 빛내어 나라의 대들보가 되었으라. 당시에 오랑케 학문을 숭상해 이단의 말이 떠들썩했는데 홀로 서서 이를 배척하여 사도(斯道)가 이로써 밝아졌느니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올라 정무를 모두 총괄해 다스렸지, 겸손한 자세로 분에 넘침을 경계해 호연히 청평산으로 돌아가셨지. 강호에서도 늘 나라 걱정하여 태갑편을 써서 올리었지. 임금 바로 잡는다는 한 마디 말씀 노성(老成)한 신하로서 부끄럼 없으니 왕이 이르기를 멀리 가지마라. 내 그대의 충성 가상히 여기노라. 조정 신하들이 서로들 경하하여 다시금 아형(阿衡, 재상의 자리를 뜻함)이 되었어라. 저 오랑캐들이 우리 서쪽 국경을 넘어왔을 때 시례(詩禮)를 갖춘 장수가 되어 여유롭게 계책을 운용하여 한 번 북소리에 적을 소탕하고 어가를 호종해 서울로 돌아왔지. 공로는 기린각(공신각을 뜻함)에 맨 먼저 올랐고 예는 종묘에 배향되었어라. 대체가 이미 세상을 덮으니 세세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리. 이에 유림의 사당이 있으니 갈천의 물가이었는데 좋은 운세가 그만 다하여 사당이 훼철되고 말았네. 이에 비석을 깎자고 도모해 그 거리에 표지로 세우노라. 바다는 넓고 산은 길어도 이 아름다운 일이 더욱 유구하리. 내가 비석에 명을 새기니 실로 영광스런 일이로다. 선생 가신 후 536년째 되는 해인 1899년 4월
통정대부 사헌부지평 문소 김흥락(金興洛)은 삼가 짓고
후손 맹연(孟淵) 쓰고, 후손 기윤(基潤), 백제(栢濟) 종훈(種勳) 세우다.

(2) 문열공 도촌 이선생 유허비문(번역문)


천하의 뛰어난 현인과 이름난 석사(碩士)가 왕왕히 지령(地靈)으로 태어남이 많은데 지금 문열공(文烈公) 도촌(桃村) 이 선생의 유허(遺墟)가 더욱 그렇게 믿겠도다. 유지(遺址)는 고주(固州, 固城) 고을 서쪽 송수 마을이 있는데 큰 바다가 앞에 있고 높은 산이 뒤에 있어 엄연히 한 도시에 청화(菁華, 깨끗하고 매우 순순한 기운)가 모여 선생이 태어나셨으니 아아! 참으로 기이하도다. 선생은 승국(勝國, 여기에선 고려) 명현(名賢)의 후예로서 문희공(文熺公), 문헌공(文憲公) 가정에 태어나 기맥(氣脉)의 서로 이음은 참으로 보통 사람과 다름이 있고 또 행촌 선생은 바로 공의 형이 되느니 만큼 학문을 성취하여 구슬처럼 아름다움은 저 중국 진씨(陳氏)의 이방(二方)과 육기(陸機), 육운(陸雲) 같은 이도 족히 이보다 더하지 못하리라.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생전에는 아침 저녘으로 거처를 살핌에 게으르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죽을 마시며 슬픔을 다 하였으며 몸가짐이 엄정하고 늠름하여 가히 범하지 못할 태도를 항상 간직하였다.
충숙왕 13년(1326)에 과거에 급제하여 재상(宰相)의 천거로 시어사(侍倒史)가 되었더니 공민왕 6년 (1357) 형부상서에 승진하여 황태자 천추절(千秋節)에 진하사(陳賀使)로 元나라에 갔었다. 1360에 국자시 (國子試)를 관장하여 박계양(朴季陽) 등 90여인을 취하니 모두 한 때의 청선(淸選, 淸直한 선발)이라 일컬었다. 어사대부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러 세상 일이 모두 그릇됨을 보고, 드디어 병을 핑계로 멀리 떠났는데 이때 시(詩)를 지어 읊기를 “한 이름이 인간에 떨어짐이 심히 부끄럽도다” 하였다. 후에 매월(梅月) 김公이 시를 지어 읊기를 “맑은 바람 쉬지 않은 도촌(桃村)의 달빛일세”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족히 공의 뜻을 보겠도다. 아아! 행촌선생의 문장과 학술의 성함이 세상에 빛나리라 사람들이 칭송하고 백세에 전해져 선생으로 더불어 함께 아름다운즉 산이 가히 무너지고 돌이 가히 부서질지언정 공의 이름은 장차 다함이 없이 전하리니 어찌 군소리를 하겠는가?
이씨의 계통은 철성(鐵城)에서 나왔고, 밀직사(密直使) 황(璜)은 그 상조(上祖) 이다. 증조는 진(瑨)이니 승문학사(承文學史)요, 조부는 존비(尊庇)니 판밀직(判密直)으로 시호가 문희(文僖)요, 父는 우(瑀)이니 철성군(鐵城君)으로 시호가 문헌(文憲)이며 비(妣)는 함양군부인 박씨로 판삼사(判三司) 밀양군(密陽君) 지양(之亮)의 따님이다. 공께서는 신축년(1301)에 태어나 1361년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장단 대사현 서재동(書齋洞) 계좌의 언덕에 계신다.
배위는 삼한국부인 이씨로 성산군(星山君)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임(琳)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요, 희필(希泌)은 고성군(固城君)으로 시호가 충정(忠貞) 이며 네분의 사위에 정주(鄭鑄)는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요, 유번(柳藩)은 청천군(菁川君) 이요, 경보(慶輔)는 양정공(良靖公) 이요, 문달한(文達漢)은 찬성(贊成) 이다. 림의 아들 귀생(貴生)은 상호군(上護君) 이요 무생(茂生)은 판밀직(判密直) 이요, 사위 유염(柳琰)은 문간공(文簡公) 이며 최렴(崔濂)은 양정공(良靖公) 이요 따님은 근비(謹妃)이시다. 희필(希泌)의 아들 은(慇)은 판중추(判中樞)요 근(懃)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다. 귀생(貴生)의 아들 운로(云老)는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은의 아들은 목사 조(鵰)와 붕(鵬) 이요, 근(懃)의 아들 중지(仲止)는 지중추(知中樞)요, 중정(仲正)은 사직(司直)이요, 운로(云老)의 아들 종(瑽)은 증 병조판서(兵曹判書) 이며, 포(⺩包)는 돈영부승(敦寧府丞) 이요, 종(瑽)의 아들 교연(皎然)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시호가 공안(恭安)이요 분연(賁然)은 부사(府使) 이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어느날 공의 예손(裔孫) 광선(光善) 광조(光祚) 선도(善道) 등이 오백리 길을 찾아와서 비문올 청하므로 불영(不佞)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위와 같이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 명(銘)에 이르노니

걸특한 천품으로 혁혁한 가문에서 태어나시어
조상의 유풍(遺風)을 이어 兄과 재덕(才德)을 나란히 하였도다.
연용(攣龍)의 문장이요 화국(華國)의 학술(學術)을 지니고,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재상(宰相)의 천거를 입었도다.
한림원의 청반(淸班)이요 전조(銓曹)의 놓은 지위로다.
중후(重厚)한 태산처럼 움직임에 어긋남이 조금도 없었도다.
크고 큰 명망이요 크고 큰 실적이었도다.
기미를 보고 훌쩍 자취를 감추어 빨리 돌아왔도다.
녹문(鹿問)의 높은 발걸음이요 율리(栗里)의 맑은 지절이로다.
한 이름 떨어짐을 선생은 두려워 하였도다.
소나무는 푸르르고 맑은 바람 그치지 않도다.
천고에 밝게 비추는 도촌(桃村)의 밝은 달이로다.
무릇 많은 군자들은 이 돌에 새긴 글을 볼지어다」
고종 36년 기해(1899년) 8월 일
통사랑 전행 의금부도사 문소 김도화 삼가 지음
후학 김녕 김의권 글 쓰고, 17세손 광배, 광업, 광주, 선필 세우다.

(3) 유허정화기문


시조 휘 황께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철령군의 군호를 받으시고 철성(지금의 고생)을 관향으로 삼으셨다. 그후 시조이하 9세까지 이 고장에서 세거하셨으므로 유허비문에는 9세까지의 세덕만을 대강 약술하였다. 원래는 이곳 유허와 그 소속된 땅의 규모가 광활하였던 것이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약 700여평 만 남게되었다. 이 땅마저 한때는 불법건물을 지었던 것을 철거시키기도 하였으며 이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던 여러채의 가옥들을 이번에 옮기게 하였으니 그로써 지적대로의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동안 이 옛터를 성역화하려는 오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지내오던 중 1988년 12월18일 전국 각파 대표와 각지역 종친회장이 고성에 모여 숙의한 끝에 철성이씨유허비를 세움에 있어 비문은 종욱(鍾彧)이 기초한 것을 위원회에서 여러차례의 독회를 거쳐 완성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세워져 있던 杏村, 桃村 양 선생의 유허비도 경내로 옮기고 천년고기를 성역화하므로써 오랜 숙원사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 백세의 성사를 마무리함에 즈음하여 선조의 의적을 거울삼아 숭조 목족하고 애국효행하는 훌륭한 후손들이 배출되기를 빌면서 유서깊은 이 터전을 영원토록 보존하기 바란다.


1992년 3월 일 고성이씨대종회장 이종왕

유허정화위원회장 이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