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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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향(貫鄕)


1. 고성군 건치 연혁(번역문)


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성군은 본래 소가야국이었는데 신라에서 취하여 고자(古自)군을 설치하였고 경덕왕때에는 고성군으로, 고려 성종은 고주(古州) 칙사를 두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현종때는 거제에 속하였고 뒤에 현령을 두었는데 원종은 주(州)로, 충렬왕때에는 남해에 병합되었고 공민왕때에 현령을 두어 조선조에 이르렀다. 별호는 철성이라고도 한다. 고려조 여지승람에는 고자(古自), 철성(鐵城), 고주(古州), 고성(固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성(철성)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는 우리 고성이씨 이외에 김씨, 남씨, 박씨, 채씨 등이다.



2. 우리의 관향 : 고성


우리의 성의 근원은 실로 아득하고 멀다고 하겠다. 이 땅에 와서 정착한 도호원수의 후손들은 왕검성(王儉城) 이었던 평양에서 대대로 살아오다가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에 이르는 동안 차츰차츰 남하하여 송도(松都)를 거쳐 영남의 철령(鐵嶺: 고성의 옛이름)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시조(휘:璜) 께서는 이 고장에서 한결같이 덕을 베풀고 바른 길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벼슬길에 올라서는 고려덕종 2년(1033)에는 좌우위맹교위로 거란병을 토벌함에 큰 공을 세 웠으며 그 후 밀직부사(종6품, 현 청와대비서관과 같음)가 되셨고, 문종 17년(1063)에는 호부상서(정3품으로 장관급임)에 임명되어 많은 공적을 남김으로써 철령군(鐵嶺君)의 봉호(封號)를 받았다. 이로서 후손들의 근본을 더욱 굳건히 확립하고 새로워졌으니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철령고을(현재의 固城)은 우리의 관향(貫鄕)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성에는 시조 이하 5세6위의 단소(壇所)를 비롯한 선세 3묘(문산공, 문헌공, 문헌공의 배위 함양군군부인 함양박씨의 묘)와 봉산재(鳳山齋), 그리고 6世 문산공이 은거수덕(隱居修德)하던 문소산(文邵山)과 망양정(望洋亭), 그리고 上世의 선조가 세거(世居) 하였던 고성유허(固城遺墟)와 일찌기 행촌(杏村)선생을 받들어 모셨던 금봉서원(金鳳書院) 등이 있었으나 금봉서원은 임진왜란의 병화로 서원 건물이 소실되고 상량문만 남아 있었다. 이 서원을 계승하여 행촌(杏村)·도촌(挑村) 양선생의 학덕을 기리어 사림(士林)들이 봉사 (奉祠)하고 있는 갈천서원(葛川書院)과 고성 송수동에 있는 행·도촌 양 선생의 유허비 등이 있어 후손들이 선조를 경모하는 사적(史蹟)이 되고 있다.
고성의 고대국명(古代國名)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서는 변한 12국(弁韓十二國) 가운데 하나인 변진 고자미동국(弁辰 古資彌東國)이라 하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고사포국(古史浦國) 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오가야(五伽倻) 조에서는 소가야(지금의 고성)라 하였으며, 같은 책 물계자(勿稽子) 조에서는 고자국(古自國)이라 하였고, 일본 서기(書記)에서는 구차국(久嗟國) 혹은 고차국(古嵯國)이라 하였다. 역사가 들의 통설에 따르면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금관가야(金官伽倻, 현 김해)가 신라에 투항하였으며, 서기 562년(진흥왕 23) 대가야(고령)가 멸망하면서 소가야를 포함한 가야 연맹도 소멸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는 소가야를 점령하고 그곳에 고자군을 설치하였다가 경덕왕 16년(757)에 고성군으로 개명하였다. 이 군명의 변천에 관한 기록은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같은 맥락으로 쓰여져 있다.
원래 본관이란 대체로 시조의 출신지라 하였으니 어떤 종족의 본관과 그 고을 이름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고을 이름은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니 그런 경우 저절로 옛 이름과 새 이름이 함께 불리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본관 지명(本貫 地名)도 이와 같아서 옛날부터 쓰여진 바 있었던 몇 가지 고을 이름 중에서「철성」과「고성」두 가지만이 최근에 이르도록 우리의 관호(貫號)로 쓰여 왔다. 그러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국가통치권 박탈) 후인 왜정 때 당시의 어른들은 그저 예사로이 호적상의 본관을「鐵城」으로 혹은「固城」으로 각기 다르게 신고하였으므로 1본(一本)인 우리가 마치 2본(二本)인 것처럼 호적에 실리어 문서화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관호와 본관이 두 가지로 쓰이게 된 것은 군명의 변천에 따라 가변성을 지녔지만은 우리가 동근동종(同根同宗)이라는 근본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관 때문에 왈가왈부할 하등의 이유도 있을 수 없고 더구나 동종(同宗)의 윤리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잘 다스려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