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성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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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姓)의 내력(來歷)


우리나라의 모든 姓氏는 일반적으로 토착민과 귀화민(歸化民)으로 대별할 수 있다. 우리 固城李氏는 중국 한나라에서 귀화한 씨족으로서 평해황씨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귀화씨족 중의 하나이다.

고성이씨 명현열전(名賢列傳)에 의하면「유승운 한문제시이반중서사인 한무토조선시반후손이도호원수출래잉거언 반후이십사세손황이현원불가고(遺乘云 漢文帝時李槃中書舍人 漢武討朝鮮時槃後孫以都護元帥出來仍居焉 槃後二十四世孫璜而玄遠不可考)」「전해 내려오는 바에 이르기를 한나라 무제때 이반(李槃)이라고 하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 있었는데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침략할 때 이반의 후손이 도호원수가 되어 우리나라에 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라 기록되어 있고「반의 24세손이 황(璜)이라고 하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고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도덕연원(道德淵源), 선가요람(仙家要覽), 열선전(列仙傳) 등의 심원록(尋源錄)을 통하여 채록(採錄)한 성윈제설(姓源諸說)에 따라 우리의 아득한 옛날의 시원(始源)을 찾아 올라가면 중국 고대의 제왕이였던 전욱(顓頊)에게 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姓」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후손인 고요(皐陶)부터 라고 한다. 고요는 요나라 임금 때 대리(大理)라는 벼슬을 하였고 그 후손도 또한 하(夏)나라와 상(商) 나라(殷나라의 처음 이름)에서 대를 이어 대리가 되었으므로 그 관명에 따라 그들의 姓을「이씨(理氏」라고 하였고 그의 후손「이미(理微)」는 주왕(紂王) 때에 그의 바른말이 용납되지 않아 죄를 얻게되었고 그의 아들「이정(利貞)」은 이로 인한 견융(犬戎, 옛 중국의 부족 들을 말함) 들 간의 전쟁을 피하여 제후들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온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때「利貞」은 姓을「李」로 고쳤다고 하며 그 후 여러 대를 거쳐서 춘추시대(기원전 4세기)의 사상가였던「老子」(姓은 李요, 이름은 耳이며, 자는 담(聃)이요 초나라 사람)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老子」는 또 그의 어머니가 큰 별들이 흐르는 태몽을 꾼 후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고 또 오얏나무(李樹)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탄생설화에 연유하여 姓을 李로 하였다고 하며, 그「老子」의 후손 중에는 농서방(隴西房)이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老子」로부터 다시 여러 대를 이어 내려와 한나라 문제(중국전한의 5대 황제, 재위 기원전 187~157년)때의 중서사인(中書舍人, 의정부에서 실질적인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관직-정4품)이었던 이반(李槃)에게로 이어졌으며 이도 또한 농서성기인(隴西成紀人)으로 후에 어사중승(御使中丞)이 되어 농서군(隴西君)에 봉하여지고 돌아가심에 시호를 문경(文景)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반(李槃)의 후손도 또한 농서에서 나서 후일 한무제 때 크게 등용되였다고 하였으니 농서는 그 옛날 그 분들의 터전이요 선향(先鄕) 이었던 것이다.

한무제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후 그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 등 한사군을 두였으며 그 후 한사군은 고구려에 의하여 소멸되었고 고구려는 또한 나당연합군에게 망하게 되였으며 당나라는 고구려 가 망한 뒤에 그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서기 668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정착한 도호원수의 후손들은 여기에서 살아 왔다고 하였으니 그 후대에 관한 기록은 비록 찾아볼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 시조 휘 황(璜)에 이르도록 면면히 이어져 왔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도호원수(都護元帥)가 이 땅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서기 기원전 108년이며 철령군(鐵領君)의 사적을 적은 글 중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맨 처음 기록은 고려 덕종 계유년으로 서기 1033년이니 그 동안의 연수는 1141년(108+1033)이요 덕종 계유년부터 금년 2014년까지는 981년이 되므로 전후의 연대를 통산하면 약 2121년(1140 +981)이나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 온지 2120여 년에 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동방의 유수한 성족(姓族)이라 하겠다.

또 순흥안씨 추원록(追遠錄)에 이르기를「중국 농서인(隴西人) 이원(李瑗), 이황(李璜) 형제가 신라 애장왕 8년(서기 807년)에 광주(廣州)에서 일어난 난을 진압 평국하고 경문왕 4년(864년)에 왜구침입 때 원(瑗)의 후손이 큰 공을 세우자 안국(安國)의 공신이라 하여 사성안씨(賜姓安氏)하고 또 봉군(封君) 하였으며 원(瑗)의 동생 황(璜)은 고성이씨의 시조가 되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러한 역사의 기록은 우리의 득성(得姓) 연도인 고려 덕종 1033년과는 200여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확실한 고증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는 우리 시조 이전의 성원(姓源)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