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판공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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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判公 諱 增 安東奠居淵源(참판공 휘 증 안동전거연원)



고성이씨는 여조(麗朝) 때부터 크게 들어났으니, 호부상서(戶部尙書) 휘 황(璜)이 始祖이며, 이로부터 代를 이어 공경재상(公卿宰相)이 연다라 이어져 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 진현관대제학좌상시(進賢館大提學左常侍), 감찰대부(監察大夫), 세자원빈(世子元賓),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훈봉(勳封)되시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며, 휘 존비(尊庇)께서는 참판공(參判公)의 5代祖이다.

高祖의 휘는 우(瑀)니 삼중대광삼사사(三重大匡三司事)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曾祖의 휘는 암(嵒)이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호는 행촌(杏村)이다. 명필로서 서법이 중국명필 조자앙(趙子昻)과 같다고 하였다. 祖의 휘는 강(岡)이며 대제학(大提學)이요,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호는 평재(平齋)이다. 考의 휘는 원(原)이요,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는 양헌(襄憲)이요, 호는 용헌(容軒)이다.

公은 용헌공 휘 원(原)의 여섯째아들로서 자는 자겸(子謙)이며, 1419년에 한양에서 태어나셨다. 풍모와 자태가 깨끗하고 시원스러우며,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453년에 進士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진해(鎭海),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역임 하셨는데항상 청겸하고 신중하여 자애롭고 은혜로워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공께서 남쪽 안동으로 오신 유래를 살펴보면 1445년에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여 등국(登國)함에 의분강개(義憤慷慨)한 선비들은 모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임천(林泉)에 은둔(隱遁)하는 풍조가 많았다.

公이 벼슬을 그만 둘 때는 마침 위태롭고 혐의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그 까닭을 공명(公明)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비록 公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또한 公을 위하여 숨겼을 것인 즉 훗날 사람이 단지 公이 벼슬에 뜻이 적어서 세상을 떠나 은둔한 줄만 알고 실제 公의 큰 절개(節槪)를 알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아아! 春秋의 “임금을 위해 숨겨주는 義理”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였다. 사육신(死六臣)과 비록 죽음은 다르지만 장릉(莊陵)을 위하여 忠節을 다한 臣下도 그 정충(貞忠)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에 公의 벼슬을 버린 한 절개(節槪)를 비로소 분명히 말할 수 있도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公께서는 단종(端宗) 손위(遜位)를 들으시고 영산현감(靈山縣監)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가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경상감사(慶尙監司)인 외구주(外舅主=丈人) 휘(暿)의 상사시(喪事時) 안동으로 내려와 수려한 강산과 순후한 풍속을 보셨던 안동에 전거(奠居) 하시게 되니 장릉(莊陵)의 정신(貞臣)이며, 바로 안동 입향조(入鄕祖)이시다.

당시 안동 세록가(世錄家) 5門中에서 권자겸(權自謙 司勇), 배효건(裵孝騫 縣監), 이 증(李增 縣監), 남치신(南敬身 副使), 노맹신(盧孟身 司勇), 배효눌(裵孝訥 通贊), 남치공(南致恭 司正), 권곤(權琨 司勇), 남치정(南致晶 進士), 남치인(南敬仁 副使), 배주(裵裯 忠贊衛), 배정(裵禎 訓導), 권숙형(權叔衡 別侍衛) 등 13賢이 成宗 9年(1479)에 우향계(友鄕稧)를 맺어 5門中 후손들이 지금까지 약 530餘年을 이어오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최장수(最長壽) 유계(儒稧)라고 할 수 있다.

계회시(稧會時)에는 선성선사(先聖先師) 神位에 존작(尊爵)한 후 덕업(德業)을 상권(相勸)하고 과실(過失)을 상규(相規)하며 예속(禮俗)을 상교(相交)하고 환란(患難)을 상구(相救)하는 향약장조(鄕約章條)를 상약(相約)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 등 행사를 통하여 선속풍화(善俗風化)에 힘쓰고 林泉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으며,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선생 같은 거유석학(巨儒碩學)이 우향계가(友鄕稧歌)를 지어 계축(稧軸)에 첨기(添記)하여 추로당풍(鄒魯唐風)이라고 찬양(讚揚) 하였으므로 안동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함은 여기에 기인(起因)한 것이다.

그간 530餘年間 지속한 유계(儒稧)로 우리나라에서는 우향계(友鄕稧) 뿐이며, 세구년심(世久年深)하여 안강노씨(安康盧氏)는 유이원지(流離遠地)하여 거주지를 알 수 없어 4門中이 每年輪番제로 계회를 주관하여 행사를 하여왔다. 그러나 安康盧氏 후손을 찾기 위하여 여러 經路를 통하여 노력한 결과 그 후손을 相見하여 확인하고 2002年度 부터 계회에 참여하게 되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우향계원 13賢中 參判公 만이 영가지(永嘉誌) 인물 란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선생이 지은 우향계가(友鄕稧歌)까지 첨기되어 있다.

530餘年間 긴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임진란(壬辰亂) 일제시대(日帝時代) 光復後 6.25전쟁(戰爭) 등으로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인 문부(文簿), 시집(詩集), 서찰(書札, 시도기時到記) 등 다량이 소실된 것이 아쉽고, 그나마 우향계안(友鄕稧案), 우향계축(友鄕稧軸), 계회시첩(稧會詩帖), 세수계회원록(世修稧會員錄), 근세문부(近世文簿), 시도기(時到記) 일부가 보존된 것이 다행한 일이다.

이 귀중한 우향계안(友鄕稧案)을 문화재로 지정 신청하여 2001년 11월 1일자로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第327號로 지정을 받고 우향계안(友鄕稧案)과 우향계축(友鄕稧軸), 계회시첨(稧會詩帖) 세수계회원록(世修稧會員錄) 등 4권을 안전보존(安全保存)하기 위하여 보관시설이 완비된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에 보관기탁 하였다.

또한 5개 문중윤번제(門中輪番制)로 매년 友鄕稧 행사를 치르게 되니 적당한 장소 및 건물이 없어 행사수행(行事遂行)에 어려운 門中이 있고, 祭器 등 비품운반(備品運搬)이 불편한 실정이라 友鄕稧案이 文化財로 지정됨을 계기로 우향계안 등 여러 문부(文簿) 보관 장소 및 계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우향각(友鄕閣)을 건립 코저 2002년 4월에 안동시장을 同年 5월15일에 경북도지사를 방문하여 이 실정을 충분히 설명 이해토록 하여 道費 1億2千萬원, 市費 8千萬원 합 2億원의 예산을 영달 받아 2003년7월에 착공하였으며, 부족액 약 3千萬원은 5개 門中 자부담으로 당년말까지 훌륭한 우향각(友鄕閣)이 완공되어 2005년부터는 契會行事를 여기서 개최하게 되었다.

우향각 건립이후 우향계를 수계하신 13位 先祖님들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기 위한 사당건립이 절실하다는 공론에 따라 다시 경상북도의 예산을 교부받아 5門中이 협조하여 2006년 2월 23일 착공하였으며, 同年 4월 25일에 준공하였다. 준공과 동시 창계하신 13賢의 위패를 모시고 每年 陰曆 3월 18일 享祀를 봉행한다.

參判公 墓所는 안동시 와용면 미질리 水多山에 위치하여 와우형국(臥牛形局)으로서 嶺南에서 으뜸가는 明堂이라 영가지에 기록되어 있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주위가 망망대해(茫茫大海)를 이루었으며, 기억의 山名과 같이 水多山이 현실에 부합하였으며, 창해와 더불어 참판공 후예 은성영원무궁(殷盛永遠無窮)하리라. 믿어진다.



자료발취 : 固城李氏 安東奠居 淵源과 文化遺産 (고성이씨 안동종회)

2015년 7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