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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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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물안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7-08-10 14:10 조회206회 댓글0건

본문

 

함휘각

소재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정곡8길 8-4 

지역의령 

 

송암(松巖) 이로(李魯, 1544~1598)는 1564년에 진사시험, 1590년에 문과에 합격한 후 현감, 사간원 등을 역임했다.

이로의 나이 4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서울에 있었는데, 일본군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인 1592년 5월 4일 경상남도 함양에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났다. 이때부터 이로는 김성일을 따라 행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5월 10일에는 산청에 도착하여 소모관각주1) 의 직책을 맡아 삼가 · 단성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한 후 진주로 향했다.

진주에서 김성일과 함께 일본군을 막을 방책을 마련하고, 또 인근 의령 · 합천 지역을 돌며 의병들을 격려하는 등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 무렵 관찰사 김수가 곽재우를 무고하자 이로는 김성일과 함께 상소를 올려 곽재우를 변호했다. 이로는 그해 7월에 일본군이 진주 일대에 진입하자 김성일과 함께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어 김성일의 추천으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8월에 김성일이 좌도관찰사로 옮겨가자 이로는 초계에서 송별하고 다음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9월에 김성일이 우도관찰사로 다시 오자 지리산에서 나와 산청에서 오장(吳長)과 함께 김성일을 맞이했다.

1592년 10월 창원, 부산, 김해에 주둔한 일본군이 진주로 진격해오자 이로는 김성일을 따라 의령으로 가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때 진주에서는 판관이었던 김시민이 목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을 사수했다(제1차 진주성 전투).

이로가 50세가 되던 1593년 4월 초유사 김성일이 진주공관에서 사망했다. 이때 이로는 위독한 김성일 곁에서 주야로 간호하며 보살피고 있었다. 이로는 김성일의 시신을 염한 뒤 임시로 지리산에 매장, 안치했다가 7개월 후에 고향으로 모셔가 안장했다. 이로는 그해 가을 형조좌랑에 제수되고 이어 창원가수(昌原假守)가 되었으며, 51세 때는 비안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로는 53세 때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으나 체찰사각주2) 이원익(李元翼)이 그를 종사관으로 임명했다. 이로의 나이 54세 때 그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3월에 용사일기(龍蛇日記)각주3) 를 완성했다. 이곳 함휘각에는 그가 전쟁일기인 용사일기를 간행하기 위해 제작한 책판이 보관되어 있다. 용사일기는 이로가 임진왜란 당시 김성일의 휘하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맡으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매일 기록한 글이다. 특히 1592년 4월 전쟁 발발 시부터 15개월간의 전쟁 상황을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김성일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당시 의병활동, 관군 상황, 의병과 백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그가 1598년 사망한 후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의 직위를 내렸다. 용사일기는 그의 사망 후 오랜 기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763년(영조 39)에 후손인 이당혁에 의해 간행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문집 총 88매 중 절반인 44매는 파손되거나 소멸되고 나머지 44매가 보관되고 있다. 현재의 함휘각 건물은 이로의 후손들에 의해 1970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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