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일가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웃음소리가 창밖까지 번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좋은 글

데라우치 문고와 나의 아버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8-22 13:19 조회599회 댓글2건

본문

테라우치 문고와 나의 아버지


 이승률 (사)동북아공돋체연구재단 이사장
연변과기대, 평양과기대 대외부총장

2006년 5월 13일, 우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예술의전당은 마치 연두빛 치마폭을 몸에 두르고 한가롭게 가로누워 있는 듯했다. 눈부신 5월의 신록이 어느 때보다도 싱그럽게 느껴졌던 그날, 예술의전당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있었다. 당시 예술의전당에선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테라우치 문고 유물들을 특별 전시하면서 관련 학술 세미나가 열리게 돼 있었다. 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이 개회사를 마친 후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사람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었다. 유 청장은 테라우치 문고 소장 유물 환수는 그동안 성사된 해외 유출 유물 환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으며, 유물 환수를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순간 내 가슴 한 켠이 뭉클해져 왔다. 유물 환수의 공로자 중 맨 먼저 거론된 이름,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테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맨 먼저 확인하고 그 유물을 고국으로 되찾아오기까지 6년여 동안이나 오직 한마음으로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 이종영(李鍾煐), 그는 바로 돌아가신 내 선친이시다. 

아버지께서 처음 테라우치 문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건 1990년경이었다. 평생 교육공무원으로 일해 오신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신 뒤 문중종친회(고성이씨)의 일을 맡아보고 계셨다. 자연히 문중 관련 기록과 문건들을 정리하게 되셨는데, 우연히 1974년 9월호 『월간서예지』 속에서 고려 시대 송설체의 대가인 행촌(杏村) 이암(李嵒) 선생의 진적 중 2점이 테라우치 문고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조이신 행촌 선생의 글씨는 비명(碑銘) 등을 통해 더러 확인된 경우는 있으나, 진적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2점의 진적이 선조의 행적을 밝히는 데 중요한 문건이 되리라 생각한 아버지는 이 사실을 종친회에 알린 뒤, 종친회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행촌 선생의 진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직후 일본으로 건너간 테라우치 문고의 소장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7개월간 애를 태우다가 겨우 테라우치 문고 유물들이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야마구치여자대학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일본 야마구치여자대학으로 달려갔고, 그렇게 테라우치 문고와 조우하게 되었다. 이 만남은 이후 아버지의 후반 생애를 관통하는 전환점이 됐다.

원래 목적은 테라우치 문고 유물 속에 행촌 이암 선생의 진적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선조의 유품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유학자와 시문(詩文)의 대가, 임진·병자 양란의 명장, 충신들의 육필 시고(詩稿)가 수백 점씩 잔뜩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문화재 강탈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했다는 사실은 피상적으로나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드러난 실체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양이었다. 그날 아버지가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억울하게 포로가 된 우리 유물을 어두운 이국의 창고 속에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 그리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였던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깜짝 놀란 박 위원장은 일본으로 달려갔다. 빛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어두운 창고 한 켠에서 100년 가까운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좀이 먹어 들어간 흔적이 역력한 유물을 본 박 위원장은 ‘포로로 잡혀온 것도 억울한데 암까지 걸려 죽어 가고 있다’며 통탄해 마지않았다.

이후 박 위원장과 아버지는 이 유물 환수에 뜻을 같이하고 국회 한일친선협회와 한일의원연맹 등을 통해 공식적인 반환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과거에 약탈해 간 문화재를 본국에 반환해 준 예는 거의 없다. 때문에 반환 작업은 처음부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야마구치여자대학과 소유주인 테라우치 가(家)를 설득하는 게 급선무였다. 한두 점도 아닌 천 점이 넘는 막대한 수량의 역사적·문헌적 고증 가치가 뛰어난 유물을 쉽게 내줄 리가 없었다.

그런 즈음 결정적인 협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경남대학교였다. 당시 경남대학교는 개교 50주년(1996)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의 환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재규 총장을 비롯해 학교 관계자들이 해외로 그 대상 유물을 물색하러 다니던 중 테라우치 문고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민간 교류 차원에서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마침 경남대학교는 우리나라와 최단 거리에 위치한 규슈 지역의 여러 대학들과 학술 교류를 추진하고 있던 중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경남대학교가 전면에 나서서 야마구치여자대학 측과 반환 교섭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야마구치여자대학과 테라우치 가(家)는 조건 없는 기증 의사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995년 11월 11일 기증각서 조인식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몇 년간 노심초사하며 매진해 온 환수 작업이 기증 직전에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당시 유물환수단은 조인식을 하러 떠나면서 이 사실을 각 언론사에 알렸다. 사실 그동안 해외 유출 문화재가 공공기관끼리의 정식 기증 절차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온 예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런 탓에 각 언론사에서 앞다퉈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는데, 논조 대부분이 ‘총독 테라우치가 강탈해 간 약탈 문화재 반환’이라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야마구치여자대학과 테라우치 가에서는 이 점을 가장 염려했었다. 그들이 선의로 그 유물을 내준다 해도 그것이 한국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가를 그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여지없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본 야마구치여자대학과 테라우치 가가 대경실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직후 양측에서는 “유물을 못 주겠다.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내용을 통고해 왔다.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환수단은 포기하지 않고 야마구치여자대학과 테라우치 가를 상대로 성심껏 설득했다. 그러자 다행히 “당일 오후 5시까지 ‘강탈’이 아닌 ‘수집’으로 바꾼 정정 기사를 내 주면 협상에 응할 수 있다”고 양보해 왔다. 이후 환수단 측에서는 전화통을 붙잡고 주요 언론사와 피 말리는 입씨름을 했고, 그 결과 한 신문사가 ‘경남대학교 총장의 말에 의하면 테라우치 총독이 수집, 일부 사 가지고 갔던 유물’이라는 정정 기사를 짤막하게 써 주었다. 환수단은 그 지면을 크게 확대해 야마구치여자대학과 일본 언론사에 보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그렇게 극적인 기부증서 조인 서약을 이루어 냈고, 마침내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1월 24일, 기증각서에 의거한 97종 134점이 경남대학교 인수인단의 손에 의해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4년 후 나의 선친께서는 70세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즈음에, 당신 생애 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여쭤보았다. 그러자 선친은 서슴없이 테라우치 문고 유물 반환에 기여한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선친이 테라우치 문고 속에서 선조 이암 선생의 유품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유학자와 시문(詩文)의 대가, 임진·병자 양란의 명장, 충신들의 육필 시고가 잔뜩 소장되어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오셨을 때 좋아하시던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찍어 온 사진들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밤새도록 들여다보시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으면서 기쁨에 겨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지금도 순수한 애국 애족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역사 회복을 위하여 헌신했던 이름 없는 한 민간인의 눈물 어린 집념과 수고를 기억한다. 나는 이렇게 뜻 깊은 생애를 살다 가신 선친이 무척 자랑스럽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사심도 없이 당신 앞에 주어진 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마치 적진 탈환을 위해 산화(散花)한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탑처럼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 조용히 외롭게 서 계신 것이다. 그러나 자식 된 내 마음속에는, 그분이 걸어가신 길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어떤 위인이 걸어갔던 흔적보다도 더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그래서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나는 18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 대가 없이 오직 민족 사랑으로 연변과기대 사역을 위해 쫓아다녔고, 또한 평양과기대 건립을 위해 의로운 동역자를 찾고자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더러는 지치고 또한 남이 몰라준다 싶어 섭섭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이 외롭거나 슬프지 않은 것은 나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 마침내 귀중한 내 민족의 유물을 되찾아 오신 아버지의 덕행과 겸손이 나에게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도 이제 환갑에 이르렀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 나는 조국과 민족의 역사 앞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연변과기대를 통해서 항일 독립 투쟁의 희생 위에 세워진 중국 조선족 사회의 고난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애환 속에 묻혀 있는 ‘독립 의지와 개척 정신의 문고’라도 찾아 나설 것인가? 아니면 평양과기대를 통해서 공산 치하의 땅속 깊이 붉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피와 눈물의 ‘혈류대하문고’라도 찾아 나설 것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지금 떠나고 있는가? 5월의 푸른 숲으로 난 길은 정녕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가?

추천 1

댓글목록

대종회장16대님의 댓글

대종회장16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보내주신 말슴 고맙습니다.

애국활동에 몰두하다보니 지치거나 외로울 때 "나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 마침내 귀중한 내 민족의 유물을 찾아오신 아버님의 德行과 겸손이 나에게 힘이되었다"  는 귀하의 생각은 당연하면서도 귀하의 人品을 짐작케합니다.

하시는 일에 더욱 노력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육신 건강이  "고려인의 개척정신문화  발굴과 계승" 의 성과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대종회 발전을 위해서 경험담 등 값진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종회장(16대)님의 댓글

대종회장(16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보내주신 말씀 고맙습니다.

애국활동에 몰두하다보니 지치거나 외로울 때 "나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 마침내 귀중한 내 민족의 유물을 찾아오신 아버님의 德行과 겸손이 나에게 힘이되었다"  는 귀하의 생각은 당연하면서도 귀하의 人品을 짐작케합니다.

하시는 일에 더욱 노력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육신 건강이  "고려인의 개척정신문화  발굴과 계승" 의 성과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대종회 발전을 위해서 경험담 등 값진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