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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 석주공(石洲公) 휘 상룡(相龍) (1858~1932, 30세, 참판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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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09 21:18 조회1,3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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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 석주공(石洲公) 휘 상룡(相龍)
                                (1858~1932, 30세, 참판공파)

 

1. 머리말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한국은 안팎으로 격동의 세대를 맞았다. 안으로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화사상과 이에 저항하는 척사사상에 부딪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맞게 되었다. 이라한 민족적 위기상황의 극복 방법으로 1894년 이래 의병항쟁이,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 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들은 1919년의 3·1운동에 이르러 비로소 공동의 광장에 합류하였다.
   1910년대 중반까지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이 대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대표적인 지역이 곧 안동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계몽운동의 씨를 뿌린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그 사상을 도입한 동산 류안식(柳寅植)과 이를 정착시켜 나간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일송 김동삼(金東三)을 내세울 수 있다, 이들은 당시 혁명적이라고 할 사상의 전환을 이루었고, 따라서 혁신유림으로 불리고 있다.
   석주공도 처음에 의병항쟁에 관여하다가 사상을 전환하면서 계몽운동을 거쳐 구국항쟁의 일선에 나섰다. 일제에 강점된 직후에 만주로 망명한 그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표 인물이 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까지 역임했다.
   석주공에 대한 연구는 “석주유고(石샘遺橋)”가 고려대학교 출판부에 의해 영인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세 분야로 발표되었다.  하나는 재만 한인사회와 무장투쟁세력을 양성하고 항일운동을 이끌어간 활동이고, 다음으로는 보수적 유학자에서 근대적 유교지식인으로의 그의 사상전환의 배경과 정치사회사상에 대한 검토 등이며, 끝으로는 국내 활동인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석주공에 대한 기존 연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알리는 데에 목표를 둔다.

 

2. 가계와 학통

 

(1) 가계와 수학

  석주공은 1858년 l월 휘 승목(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초명(初名)은 상희(象義)였다. 1911년 망명 이후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는데, 계원(啓元)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고, 계원(啓源)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고성이씨 가문이 안동에 뿌리를 내린 것은 15세기 후반 석주공의 18대조 휘 증(增) 때부터이다. 휘 增은 조선개국공신 용헌공(容軒公)의 일곱 아들 가운데 여섯째로 김종직의 문하이며, 진해와 영산의 현감을 역임했는데, 처음에 안동부성 남문 밖에 우거하다가 동쪽 법흥동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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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조 휘 명(洺)은 의홍현감을 지냈으나, 관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돌아와 임청각(臨淸閣)을 지었다. 16대조 휘 굉(耾)은 예시사별제(禮賓寺別提)를 사직하고 돌아와 반구정(伴鷗亭)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증·이명·이굉 3대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한 집안의 명예와 절조이다”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청각공(臨淸閣公) 휘 명(洺)의 여섯 아들 중 다섯이 관직에 나아가면서부터 법흥동의 고성이씨는 안동지방 유력한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석주공의 가까운 조상을 보면, 증조부 범계공(帆係公) 휘 찬(瓚)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조부 망호공(忘湖公) 휘 종태(鍾泰)는 생원이며, 정재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였다. 아버지 추암(秋巖) 휘 승목(承穆)은 1871년 서원철폐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릴 때 직일(直日)의 직분을 맡았다.
   고성이씨가문은 이 때에도 인근의 유력한 양반가문과 널리 통혼하였다. 조부가 금계 의성김씨 종손인 진화(鎭華)의 딸과 결혼하여 서산 김홍락(金興洛)과 처남매부사이가 되고, 또 척암 김도화(金道和)는 조부와 매부가 되었다. 
   다음으로 부친은 안동권씨 진하(鎭夏)의 딸을 배필로 맞이하여,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 公의 외숙이 되었고, 公은 의성김씨 진린(鎭麟)의 맏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서 김대락(金大洛)의 매부가 되었고, 영해 도곡의 박경종 (朴慶鍾)이 석주공의 매부가 되었다. 또한 석주공의 장남 이준형은 진성이씨 만유(晩由)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딸은 진주강씨 종손인 호석(好錫)에게 출가하였다. 이러한 혼반은 학맥과 중첩되면서 유대감은 공고하게 다져졌으며,  이와 혈연적·지연적·학문적 유대가 독립운동에서 강한 유대감과 결속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石洲公은 퇴계학통의 정맥(正版)을 계승한 정재 류지명(柳致明)의 제자였던 서산 김흥락(金興洛)과 척암 김도화(金道和), 평담 이전(李銓)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전은 친족으로 석주공의 유년시절에 한문과 시를 가르쳤다. 그런데 公의 학운태도와 사상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은 김흥락이였다. 석주공은 1876년 19세에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갔고, 다음해에는  보인계(輔仁稧)에 가입하였으며, 20대에 접어들면서 강회에 참석하였다.
   법흥동의 고성이씨 가문은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이러한 경제 력을 바탕으로 해서 전기의병 이후 수년간의 의병양성과 항쟁 시도에  수  만원을 기부하였으며, 1911년 만주로 망명할 때에도 남아 있는 친척들과 제사에 필요한 토지를 충분히 남겨 두고도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지니고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망명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향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 운동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2) 강학과 유림적 성장

   석주공이 성리학의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몰입하기 시작한 시기는 29세 되던 1886년경이다. 이 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자,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성라학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승 김흥락에게 자신의 학문의 방법과 심성수양(心性修養)의 태도를 밝히면서, 경(敬)의 중요성과 공부 방법 및 실천방법을 질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나이 30대에 접어들면서 스승과 동문들간에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벌였다. 또 이 무렵부터 사회안정과 구국의 방책을 찾고  실천에 옮겼으니, 향촌사회 지배사족의 일원으로서 성리학적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향촌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위협으로부터 조선을 지키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이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서, 1890년 임청각에서 족친과 더불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주관하였으니, 향촌과 문중의 중심에 자리잡은 公의 위상을 헤아릴만하다,
   1894년 안동에서는 직접적인 농민저항은 없었으나, 예천과 상주에서는 유림군과 농민군의 전투가 일어났다. 마침 公은 승증상(承重喪)을 당하여 월곡면 도곡의  범계정(帆溪亭)에 은신하였고, 병학(兵學) 연구에 힘을 썼다.  병법에 관한 저서인 무감(武鑑)을 저술한다거나, 재래식 무기인 연노(連弩) 를 실제 조작하여 발사 실험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3. 국권회복운동과 사상의 전환

 

(1) 의병기지건설 시도

  石洲公은 젊은 30대를 향촌(鄕村) 사회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향촌사회에서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을 주도하여 향촌질서를 재정비해 나가려는 노력을 하면서 1904년에 서울에서 충의사(忠義社)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당시에 병법을 연구하여 외침(外侵)에 직접 대항할 방법을 모색했다.
  을미의병(乙未義兵) 시기에 그가 승중상으로 인하여 의병항쟁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군사 문제에 조언하고 물자를 지원하는 등 측면에서 활동하였다.
   석주공이 본격적으로 의병을 지원하고 나선 시기는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던 1905년의 연말부터 1908년 봄에 이르는 동안 그는 의병기지 건설에 나섰다. 전국 각지의 지략가· 무장들과 연계하여 경남 거창군 가조의 의병장인 차성충(車晟忠)과 연락하며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쟁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고, 그후 3년 동안 의병기지 건설과 거병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정월에는 1만민금(-萬總뿔)을 거창으로 보냈다.
   석주공은 이어 영덕의 신돌석 진영과 영주·봉화에서 활약하던 김상태의 진영에 기대를 걸었지만, 신돌석의 사망과 김상태의 피해로 인해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에서 석주공은 의병항쟁이 가지는 방략상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었다.

(2)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과 계몽운동

   1907년 11월 서울에서 대한협회가 설립될 때, 1908년 말경부터 석주공은 안동에 대한협회 지회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지회설립이 순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다. 실제 안동지회 조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방 유림들의 반응은 냉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909년 2월 순흥·영해 의병진과 연계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던 사건이 빌미가 되어 석주공이 안동경찰서에 구금되는 곤경을 겪게 되였다.
   구금된지 약 한 달만에 풀려났고, 그해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석주공은 대한협회를 정당으로 인식하였으며 정당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치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며, 토혼활동을 통해 자치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조선 후기 양반 유림 중심의 향촌자치 조직과 관련시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대한협회 안돔지회는 서양 근대사상과 제도를 수용하먼셔 민주주의를 지방차원에서 훈련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안동지회는 설립초기 재정적인 문제로 곤란을 겪었으나 1910년에 이르러  회세가 상당히 확장되고 공고해졌다.  한편 국내외 정치적 현실에 대한 대응방식이나 국권회복의 방법문제에서는 그의 뚜렷한 정차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1909년 7원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기유각서 체결 소식을 접한 石洲公은 “근일 소위 한일간의 양건 협약으로 국가 현상이 끝에 다다랐고 민생의 전도가 간두(竿頭)에 이르렀는데, 대한협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며, 더우기 안동지회는 본회의 권력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와 지방 지회에 대한 제약, 그러고 지방 사림들의 미온적인 태도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다가, 조선이 일제에 강점된 후 해산되었다.

(3) 자강운동과 서양사상의 수용

   질서 재정비 활동과 무력항쟁이 외세침략을 막는데 한계를 보이자, 석주공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에서 유인식· 김동삼· 김후병 하중환 등이 증심이 되어 천전(川前)에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행해 나갔지만 그가 여기에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는 가야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을 양성하며 이강년·신돌석·김상태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을 일어킬 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실패하면서, 그는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무렵 석주공은 근대 서양사상과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자신의 현실인식의 토대 위에서 취사선택하면서 이론을 다듬어 나갔다. 「격치집설(格治輯說) 」「진화집설(進化輯說) 」「자유도설(自由圖說)」 등이 그러한 과정에서 정리된 것이다, 즉 서양사상을 수용하면서 유학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유학사상 기반 위에서 서양사상을 재해석하면서 실천의 사상적 기반을 정립해 나갔다. 이러한 태도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이나 서간도 독립기지 건설과정에서도 일관되었다.

4. 고단의 만주망명

(1) 망명계획의 수립

   1910년 8월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를 새로운 공간 마련을 시도하고 나섰고, 그것이 바로 만주 망명으로 나타났다.
   1910년 신민회에서는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진행시켰다. 신민회의 주신수는 김대략과 이상룡을 만났고 안동지역 혁신 유림들인 김대략, 김동삼 등은 협동학교에서 망명을 논의하면서 김동삼과 김민식을 자체 조사원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주공은 신민회가 추진하던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에 적극 똥참하여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는 “만주는 단군 성조의 영토이며, 고구려의 강역이라, 비록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복식과 언어가 같지는 않지만 선조는 동일동족이라. 즉 이역(異域)이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백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는 뜻으로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펴겠다”라고 다짐하였다.
   석주공은 신민회의 사업계획을 소개받은지 2개월이 채 지나지 많은 시점에서 서간도 행을 단행하였다, 당시 많은 식구들의 이동과 정착에 소요될 비용 마련을 위해 대부분 전답과 가옥을 처분해야만 했다

(2) 망명길

   석주공은 1911년(음 1월5일) 새벽 사묘(祠廟)에 배알하고, 날이 저물 무렵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단신으로 출발하였다. 기차를 타기 위해 추풍령으로 향한 그는 하회(1월7일), 상주 봉대(鳳臺, 1월9일)를 거쳐 추풍령(1월11일)에 도착하고, 다음 날 새벽 2시에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오전 8시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 석주는 양기탁(梁起釋)의 집에서 하루 묵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논의하였다.
   석주공는 1월19일 신의주로 갔다. 이어서 1월25일 밤에 가족이 도착하였는데, 公의 막내동생 이봉희(李鳳羲), 아들 이준형(李濬衡), 조카 이형국(李衡國)과 이문형(李文衡) 및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었다. 公의 일가는 1월27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l월29일 마차 2대f를 빌려타고 출발하여 2월7일에 항도촌(恒道村)에 도착하였고, 먼저 도착해 있던 맏처남 김대락 부자를      만났다. 당초 그들의 목적지는 유하현 삼원포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한인망명에 대힌 중국민의 경계가 심해지면서 악성 소문이 나돌고 있었으므로 항도촌에 일단 자리잡았다.
   서간도에 망명한 한인들의 당면 문제는 안정된 거주지와 농사지을 땅을 구하는 것이었으며, 청나라 관리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아울러 장기적으로 안정된 정착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김대략과 함께 토지·조세 호적·사창(社倉) 제도 등에 대해 함께 논의하였다. 이상룡 가족은 5월 하순경 다시 유하현과 통화현의 경계에 위치한 영춘원으로 이사하고, 10월 하순에는 만주 유하현의 대우구(大牛溝)로 옮겼다. 정착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1910년대 서간도에서 이주동포의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중국당국, 중국 주민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자치기구의 조직과 운영이 불가결한 문제였다. 따라서 경학사·부민단 등의 다양한 자치기구가 조직되었다. 이 가운데 첫 조직이 경학사인데, 초대 사장을 석주공이 맡았으니, 만주에서 그의 비중을 말해준다. 그리고 경학사 조직으로 내무·농무·재무·교무의 4개 부서를 두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교무부의 부장으로는 유인식이 선임되었다. 이 경학사가 내세운 것이 경작과 수학이라는 것이지만, 실재로는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갈 유력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결사체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어서 부민단이 결성되였다. 이 조직의 결성 시기를 둘러싸고 근래에 1916년 설이 강하게 주장되고 있고, 1914년에 이미 존재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부민단의 중앙조직으로 서무· 법무· 검무· 학무· 재무부 등을 두고 각기 자치 및 교양을 담당하였다. 지방조직으로 대부락에 천가장(千家長)  1명을 두고, 약 100가의 부락에는 구단(區團)을 설치하고 구장(區長) 혹은  십가장(十家長)을 두었다.
   석주공 또한 인재양성을 위해 민족교육도 추진하였다. 그의 매부인 김대략은 임시로 우거하였던 항도천 북산에서 1911년 2월 초순 이미 항도의숙(恒道義塾)이라는 학교를 열었다. 이후 유하현 삼원포를 중심으로 앙명인사들이 보여들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학교설립에 대해 논의하고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5월14일에는 신홍강습소가 추가가에서 문을 열었으며, 5월 25일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석주공과 김대락 등이 모두 참여하였다.
   신흥강습소는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농토를 일구고 파종하는 병농일치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무렵 신흥강습소는 여러 인사들이 사업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는 장소가 되었다. 이 해 석주공은 영춘원에 우거하였으나, 수시 로 추가가에 와서 업무를 보았다.
   석주공의 망명 목표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무장투쟁 이었다. 무장투쟁 즉 독립전쟁을 위해서는 독립군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이주한 사람들의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한 석주공의 활동도 궁극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구축이라는 차원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 이주한인사회의 가장 큰 목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의 양성이었다. 서간도 지역만 하더라도 신흥학교를 비롯해 수십 개의 학교가 운영 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학교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이었다. 그리고 소학교와 중학교 파정을 거친 청년들은 “백서농장(白西農庄)”이라든지 “마록구농장(馬鹿溝農庄)” 혹은 “길남장(吉南庄)” 같은 곳에서 좀더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으로 성장했다.

6. 독립군기지 경영

(1) 민정기판 韓族會 조직

   1919년을 전후하여 서간도와 북부지역으로의 한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19년 조선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한족회가 결성되었다. 한족회는 유하현 삼원포 남단에 두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한족회  중앙 간부로는 회장에 이탁, 서무사장에 김종훈(金宗勳), 사판사장(査判司長) 에 이진산, 학무사장에 김형식, 재무사장에 남정섭, 상무사장에 김정제(金定濟), 군무사장에 양규열, 내무사장에 곽문, 검사국장에 최명수가 임명되었다, 지부에는 총관(總管) 검독(檢督) 등을 두어 지방자치를 관장하였다.
  한족회의 지방조직은 유하현·홍경현·통화현·환인현·집안현·임강현·해룡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전체는 1만여 호에 달했다. 각 현은 전체를 몇 개의 구(區) 아래에 다시 소분구(小分區)를 두는 형태로 조직되었는데, 유하현의 경우에 전체를 4개의 구로 나누고, 구 아래에  크기에 따라 39개의 소분구를 두었다. 각 구에는 단총리(團總理) 1명, 검찰장 1병, 검찰 24명, 백가장 1명올 두고, 소분구에 통수(統首) l명올 두었다.

(2) 군정기관 軍政府 수립과 西路軍政署로의 개편

   만주지역의 인사들도 석주공을 중심으로 유하현 고산자에서 회집하여 4월초순에 군정부를 세웠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 것과 같은 시기에 만주에 석주공 중심의 군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하는 범위에서 설립되었는데, 수립취지가 하나의 독립군 초직의 범위를 넘어선,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 정부였다. 임시정부측에서는 여운형을 군정부에 파견하여, 명칭변경과 임정산하로의 통합을 논의하게 했다.  이에 석주공은 “정부를 세우기에는 때가 너무 이르다. 그러나 이미 세원진 바에야, 한 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부(軍府)를 서(署)로 고친다”고 말하면서 상해임정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19년 11월7일 임시정부는 서간도의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편하고 한족회의 업무도 군정서에서 관리하게  한다고 결정하였다. 즉 외형적으로 서간도의 군정기관인 군정부와 민정기관인 한족회가 군정서로 통합되고. 이 군정서가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임정의 이 같은 결정에 따른 실제적인 조직개편은 이듬해 3월 말경 이루어졌다. 이 때 군정부와 한족회를 합해 조직을 개편했는데, 명칭은 균정서로 하고 일반 행정은 한족회 명의로 시행하기로 했으며, 군정서로 개편되고 임정의 산하로 들어갔다고 해서 서로군정서가 임정에 종속적인 태도만을 보인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겉으로는 독립전쟁론을 표방하면서도 실행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임정에 대해 즉각 혈전, 무장투쟁을 주장하면서 그 실현을 위한 각종 요구사항을 제시함으로써 임정과 마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3) 朝鮮獨立後援義勇團과 국내 자금모집

   안동인들이 서간도에 터를 잡으면서 가장 급한 것은 지원자금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 일시 국내로 잠임하여 자금을 마련하거나, 국내 인사들이 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남북 곳곳에서 만주 기지에 지원금을 보내거나 보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서로군정서에 대한 국내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일제에 발각된 가창 큰 사건은 조선독립후원의용단 사건이었으며, 이는  1922년 12월 의용단원 중 다수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세상에 얄려지게 되었다.

7. 임시정부 개편 요구와 국무령(國務領) 취임

(1) 국민대표회의 대표 파견

   1923년 l윌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내외 각 지역과 단체를 대 표하는 독립운동가 수 백 명이 참가하였고, 대표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자가 130여명이었다. 이 회의에서 김동삼이 바로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서로군정서는 대표의 위상이 대단하였다. 이외에도 배천택이 임시서기·비서장·군사분과위원으로 이진산이 헌법기초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편 서간도의 통의부·한족회 등에서도 대표를 선출하여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한족희 대표로는 김형식이 참가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김동삼·김형식·배천택·이진산이 모두 석주공의 측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였으므로 자연히 석주공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인 셈이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됨으로써 상해임시정부를 실질적인 독립운동 중추   기관으로 한 후 만주의 독립군단들을 통합하여 그 산하에 두어 일관적이고  총체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려 했던 서간도 독립운동세력의 이상적인 실현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석주공이 임정의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다시 한번 시도되었다.

(2) 국무령 취임

   이승만을 면직시킨 임시정부는 박은식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체제 개편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북계열 인사들이 만주독립운동세력과 石洲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동포들을 방문하고 있던 안창호는 1925년 1월 이유필과 조상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시정부 명의를 존속하기 위해서는 백암 선생이나 기타 누구든지 백암 선생과 같지 않더라도 인애(仁愛)하는 덕(德)이 있는 이면 만족하고,  (중략)  박은식 선생이나 이상룡 선생같은 이를 두령(頭領)으로 추대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라고 하여 이승만의 후임으로 박은석과 석주공을 추천하였다. 즉 정의부의 중심인물로 만주독립운동세력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석주공을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시킴으로써 정의부와의 통합을 기대했던 것이다.
   석주공은 1925년 7월7일 임시헌법 제l3조에 의거하여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다. 이에 석추공은 조카 이광민과 합께 1925년 8월 하순 반석현을 출발하여 9윌1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9월22잊 50여명이 모인 청년동맹회의 환영회에 참석하였으며, 9휠23일 삼일당(三一堂)에서 국무령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취임 후 10월10일 임시의정원에서 이탁·김동삼·오동진·이유필·윤세용·현천묵·윤병용·김좌진을 국무원으로 임명했다. 석주공은 국무원 임명에 남북만주 3부요인을 거의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선상 고질의 하나인 지방색을 감안하여 평안·한경도의 서북은 물론 기호와 영남 출신의 인물도 아울러 기용했다. 그러나 임명된 국무원들이 취입하지 않음으로써 조각(組閣)이 불가능해졌으며, 상해독립운동자 사이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12월경 북경으로 옮겼다가 다음 해 2월 국무령에서 면직 되었고 만주로 돌아왔다.
   이후로 석주는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당시 그의 나이가  69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의부내의 분규 발생의 책임과 함께 임정국무령으로 취임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이후 그의 입지가 상당히 약화되었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석주공은 “광복의 대사(大事)는 우리가 어찌 감히 잊으려오, 민중이 자각하고 이에 운이 도래하는 시기에 이르러 수치스러운 지(志)를 씻고 나쁜 생각을 호미질할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볼때,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8. 학문(學問)과 시상(思想)

  石洲公은 유학자이지만 망명 후 근대적 민족운동을 서간도에서 일관하여 전개했기 때문에 많은 해외 민족운동자와의 교분과 광복방략(光復方略)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석주유고(石洲遺稿) 권2의 책과 기타의 시(詩) 중에서 타인에게 보낸 그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널리 알려진 인물만 들더라도 도산 안창호, 백암 박은식, 백야 김좌진, 백포 서일, 사당 여준, 성산 허혁, 심산 김창숙과 왕래한 서한문 등을 수록하여 석주공 자신 뿐만 아니라 해외망명 민족운동자의 사상과 행적 등올 추구할 수 있는 자료마저 남긴 것이다. 안창호는 1919년 5월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대리로 취임한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부임 전에 곧 그가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을 영도하는 경륜을 밝힌 서한을 석주공에게 보냈다.
  이 경륜은 4개항으로 되어 첫째 외교에 관한 것으로 구미열강과 중국에 대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원조를 얻자는 국제외교이고, 둘째 내정에 대한 것으로 한족의 독립운동을 오래 지속하고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전한족의 정부로의 통합을 말한 것이고, 셋째 재정(財政)에 관한 것으로 독립운동의 자금을 공채 등을 통하여 모금하자는 것이고 마지막 항이 군사에 관한 것으로 무장항일에 관한 것이었다. 석주공은 석주유고 권4에 수록된 답안 도산 안창호 서(書)」에서 이 경륜에 답하여 전체적인 내용은 찬동하나 그 순위를 첫째로 군사에 관한 것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그를 뒷받침하는 재정에 관한 것으로 고쳐 추진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안창호는 외교에 역점을 두는 항일운동을 중요시했으나 석주공은 군사를 위주로 하는 항일운동을 주장하여 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한 광복운동의 추진을 강조하는 면을 엿볼 수 있다.
   박은식(朴殷植)과의 왕복된 서한(書翰)도 안창호와의 것과 같이 서로의 광복운동의 방략(方略)에 관한 것이 들어 있으며 그 중 권3의 “답백암 박은삭서(答白巖朴殷植書)”는 석주공이 1925년 국무령에 당선된 직후 왕복된  것이고, 권5에 수록된 “제백암문(祭白巖文)”은 박은식이 작고한 후 석주공이 평가한 그의 독립운동상의 위치를 말한 것이라 하겠다. 김좌진과의 것은 무장독립군의 양성과 활동에 관한 것으로 두 분이 특히 친밀했던 관계를 아울러 엿보게 한다.
   석주공의 학문과 사상의 대종은 유학에 있었고 그의 이 유고도 그러한 바탕에서 저술된 것이지만, 근대적 사상을 가진 여러 민족운동자와 함께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쳤고 더우기 신사상(新思想)과 학문을 배우려고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유학자적(儒學者的)인 어떤 한계성은 있으나 근대의 자유와 평등 또는 근대국가와 민족 등에 깊은 이해틀 가졌던 것이다. 권5의「자유도설(自由度說)」에서는 그가 이해한 서구의 자유의 개념을「정신적인 면의 진자유(眞自由)와 군체적(群體的)인 면에서의 전자유(全自由), 그리고 법률에 복종하는 문명적 자유(自EE)」로 3대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 또한 권5의「합군집설(合郡輯說)」에서는 근대국가와 민족에 관한 것들을 그가 가진 동양적 유교사상과 대비하면서 근대 철학적 논리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이 장문의 글은 석주공의 근대사상의 윤곽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하겠다.
   석주공의 학문 중 주목할 것은 국치 전후부터의 고대민족말달사에 관한 탐구언 것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사 등을 그는 강조하였고 기자(箕子)의 한반도동래설(韓半島東來說) 등을 부인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한국사 이해의 입장은 박은석,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가의 방향과  일치하며 그것은 한민족의 주체적 역사를 찾아 광복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세우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같은 구체적인 표현이 그들이 광복운동의 기지로 생각하여 활동한 서북간도가 모두 상고(上古) 이래 적어도 고구려-·말해까지는 우리 민족의 활동지요 한문화(韓文化)의 요람지였음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의 신흥기지로서의 관념을 굳히려 한 것이라 믿어진다.「서사록(書徙錄)」에 의하면 석주공은 미처 서간도의 첫 정착지인 영춘원에 도착하기 전에 환천도 임시 숙소에서 까지도 매일같이 틈만 있으면 한서(漢書), 신구당서(新舊唐書), 진서(晉書), 만주원류(滿洲遠流), 만주지지(滿洲地誌), 요사(遼史) 등을 탐독하여 부여·고구려·발해사 등은 물론 숙신사(肅慎史)나 백제·신라사에 이르기까지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재인식하려 하였다.
   그의 위와 같은 견해는「서사록(書徙錄)」속에 문제에 따라 제시되었고 또한 권3의「봉기자우조선(封箕子于朝鮮)」,「조선평양(朝鮮平壤」,「평양유기자묘우유정전제(平壞有箕子又有井田制)」 등과 그 밖에 여러 시문 중에 그의 특이한 의견을 첨가하고 있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이 석주유고(石洲遺橋)는 유학자이면서 근대사상을 받아들인 민족운동자 석주공의 학문과 사상을 담고 또한 그가 참여한 항일독립운동의 귀중한 사실들을 수독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 석추공의 활동이 담긴 서간도에서의 한국민족운동의 새로운 인식의 진전과 아울러 근대사의 체계적인 연구와 기술에 따라 이 유고(遺稿)는 보다 바르게 평가되고 이용될 것이라 믿어 마지않는다.

9. 맺음말
 
   석주공의 독립운동과 사상에서 나타난 특성은 다음의 네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그는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의 기반을 향촌사회로 설정하여, 지역사회의  자치조직 결성과 운영에 주력하였다. 1898년 향약의 시행,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 그리고 1910년대 만주에서의 경학사·부민단·자신계(自新稧)·한족회의 조작과 휠동 등 향촌사회 자치를 통해, 구체적 삶의 터전에서 주체세력을 결집하여 민족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석주공은 1916년에 부민단에 가담하면서 “통합자치를 행하였으며 삼권을 분립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부민단이 민주공화제적 경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수립된 한족회는 당시 남만주 한인사회의 민주적인 자치정부였다,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 기반인 남만주 한인사회는 큰 타격올 입었고 자치정부로서의 한족회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석주공은 1925년 국무령의 지위에 있을 때 “민중을 떠나서는 독립운동사업을 성취할 수 없으니, 모든 일을 온전히 민중 본위로 진행하기 위해 민중적 토대를 세울 것”을 역설했다.
   둘째, 그는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 나아가 국가건설의 주체 양성을 위한 교육에 콘 비중을 두었다. 석주공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기 이전까지는 향촌의 사족을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士)”의 양성을 위한 서원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그러나 의병항쟁을 경험하면서 지배사족, 명망가 중심의 의거만으로는 나라를 지켜내는 것이 불가함을 인식했다. 이러한 현실인식 위에서 국권회복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국권회복운동주체의 자격을 갖춘 신민(新民)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이 ‘신민‘의 양성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이었으며 학교의 설립은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중점 사업이었다. 이런 점에서 블 때 석주공이  추진하고자 했던 ‘신민’의 양성은 특정한 계층에 한정된 것이 아닌 백성 전체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의 신민은 정치적 능력과 군사적 능력을 겸비하여 독립운동의 주체, 국가건설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자임해야 할 존재였다.
   서간도 망명 이후 1910년대에도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한 교육이였으며, 국내외 독립운동에서 만주의 독립운동세력의 강도 높은 무장투쟁을 지속해 나갔던 데에는 이와 같은 군사적 실력양성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석주공의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장투쟁이었으며, 의병항쟁 이래 끝까지 관철되었던 민족운동 방법이었다. 그는 의병항쟁 단계에서부터 이미 실질적인 전투력을 매우 중시했으며, 당시 양반유생 중심의 의병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병기지 건설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무장투쟁의 물적 기반 확보를 위한 방법으로 국내외로부터 군자금 수집활동도 전개하였으나, 보다 장기적인 항전을 위해서 둔전설치를 통한 병농일치의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 했다.
   넷째, 그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끊임없이 설천적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논리를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변화하는 현실을 이해하고 운동의 주체와  방법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서양근대사상을 검토하고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
   석주공은 30대의 나이에 향촌사회의 운영문제에 주역으로 나서가 시작하였고, 40대 후반에 의병기지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방략의 한계를 자각하고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지만, 무장투쟁 노선만은 견지하였다. 만 53세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 석주공은 균사기지건설을 위해 맨 먼저 동포사회를 결속시키고 자치기관을 열였으며 교육기관과 병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3·1 운동 이후에도 군정부를 수립하고 서로군정서를 이끌면서 김동삼을 비롯한 인재를 지휘하여 독립운동계의 최고 인물로 자리잡았다. 만 68세에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선출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l932년 5월12일 길림성 서란현에서 만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석주공은 민족이 나라를 잃어가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혼신의 힘을 쏟았고, 나라를 잃은 뒤에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항쟁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상황을 논리적으로 진단하고 바른 방도를 찾아 그것을 실천하였으니. 그는 암울한 민족을 광영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등불이었다.

10. 약력

• 1858년 안동에서 출생
• 1872년 사서, 경서 통하였고 조부의 명으로 김흥락선생 문하에서 수학
• 1894년 동학과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움을 예견 월곡면 산재로
          이사하여 외세에 대항키 위한 병학 연구,
• 1895년 을미의병에 참가,
• 1905년 경남 가야산에 항일 군사기지를 설치.
• 1907년 향리 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
• 1909년 항일 세력규합, 국내외 의사들과 교통한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l개월 구금.
• 1910년 친일거두 안병준 • 이용구 등의 처단을 상소
• 1911년 1월5일 50여 가구 인솔 망명하여, 만주에서 경학사 창설
• 1912년 중국어 강습소를 설립하고 교민단체인 부민단을 조직.
• 1913년 대동역사를 저술하여 신흥학교 교재로 사용하다.
          만주지역 논농사 보급
• 1918년 무오 독립선언서 채택서명
• 1919년 서로군정서 독판으로 추대.
• 1920년 소속의 이청천을 출벙시켜 청산리에서 승리.
• 1925년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에 취임
•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힘씀.
• 1932년 5월12일 만주 서란현에서 서거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1973년 고려대학교에서 석주유고간행
• 1990년 서거 50년 만에 유해 봉환하여 임청각에 빈소마련 후
          국립묘지에 안장
• 1996년 석주 유고후집 간행하고 서울 동작동 국가수반 묘역으로 이장

11. 석주 이상룡선생 구국 기념비문

   몸을 풍우 속에 던져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치고 뜻과 업적을 남겨 이름을 후세에 드리운 이가 계시니 석주 이상룡선생이 그이시다.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읍 법흥리에서 나시니 본관은 철성이요 철령군 황의 30대손으로 아버지는 승목, 어머니는 안동권씨인데 일찍 퇴계선생의 학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선생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천문 지리 병학에까지 깊은 연구를 쌓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새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대한협회안동지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더니 마침내 1910년 조국의 국권이 무너지자 밤낮 이어 통곡하다가 문득 사당에 고별하고 청년들을 격려한 뒤 아우 봉회와 외아들 준형을 데리고 서울의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니 때는 54세 되던 1911년 1월이었다.
   그로부터 남만주 회인현을 비롯하여 통화 유화 서란 등지로 옮겨 다니며
들의 살길을 마련하기에 애쓰고 또 여러 동지와 함께 신흥학교를 세워 청년교육과 군관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9년에 독립운동의 남만주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창설했다가 뒤에 이름을 서로군정서라 고치고 최고책임자인 독판이 되시었다.
   그리자 일본군이 만주에 침입하므로 독판의 명령으로 독립군을 출병시 켜 청산리 봉오리 갑산리에서 승첩을 거두게 하고 또 길림독립군과 회담하여 교표의 길림성 거주를 자유롭게하는 외교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1925년 68세때에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여 정부안의 사상적 분렬을 조화시키기에 적극 노력하다가 울분이 그대로 병을 이루어 사직하고 도로 서란으로 돌아와 마침내 1932년 5월12일 75세를 일기로 만리 이역의 외노운 혼이 되시었다.
   5년 뒤에는 아우마저 하르빈에서 별세하고 아들은 외로이 고향으로 놀아와 거 하다가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세력이 팽창해 가므로 조국의 독립을 비관한 끝에 1942년에 단도로서 자결하여 어버이의 뒤를 따랐으며 그 밖에 아우 상동과 종숙 승화 승희 조카 형국 운형 인형들도 일제에 항쟁하다가 혹은 옥고 혹은 옥사하니 세상이 일러 과연 의렬의 가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이제껏 선생 형제를 반장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여기더니 이제 동포들이 힘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높은 뜻을 깊이 받들고자 내게 청하므로 나는 이에 그날의 사적을 대강 적고 다시 옷깃을 가다듬어 노래를 바치노니 사직이 무너지자 압록강 울며 건너 찬바람 만주벌에 흰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속에도 비시더니 거기가 어디관대 그땅에 묻히신고 그 소원 이룬 오늘 님은 정작 안계시네 혼을랑 돌아오소서 길이 여기걥소서
      1963년 5월30일 후학 이은상은 글을 젓고, 성산 이기윤은 앞을 쓰고,            종후학 종주는 뒤를 쓰고, 경상북도와 대구시는 후원하고,
          석주이상룡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대구시 달성공원내 공원입구
          좌편에 세우다

12. 추모사

  1990년 10월11일 불초 생은 인절로수(人絶路殊)한 천국에 계신 석주선생님 외 3위 영전에서 선생님을 경모(敬慕)하는 광복회원들 및 혈족을 대표하여 추모의 정을 표하려 하오나 이 일이 사생취의(捨生取義)하신 님의 거룩한 영전에 대하와 구우일미(九牛一尾)의 위안인들 되오리까마는 겨레의 종장 (宗匠)이시며 혁명영유로서 광복의 상징적 존재이셨던 선생님 같으신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이 희석되어져 가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우려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저희들의 심정을 선생님께 호소하고 님의 영혼에 어리어지게 하여 현실사회에서 부대끼고 있는 저희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나 보려는 것이온데 광복의 동지적 입장으로서나 님의 후학으로서 죄송한 마음 억제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본래 선생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며 충절의 고장이기도 한 안동에서 태어나 천자(天資)가 영민하신 선생은 약관의 연세로 벌써 석학(碩學)으로 명성을 떨치셨고 을미사변때부터 초기 항일투쟁의 기본이념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에 공명하사 이강연 허위 등 의병대장들과도 기맥(氣脈)을 통하셨고 을사륵약(乙巳勒約), 경술국치를 당하여 분연히 왜적에게 더럽혀진 이 강산을 등에 지고 이회영 일문과 이동녕선생 등 동지와 함께 만주 류하현 삼원보에 온 가족을 대동하고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정진하실 새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독판 등등 만주 서간도를 근거로 하고 조직된 모든 독립운동 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아니해 보신 일이 없으실 정도로 문자 그대로 독립운동의 화신이시며 상징적 존재이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사야도(晝思夜度)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면서 풍찬노숙(風餐露 宿) 그 고생을 어찌 필설(筆舌)로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임시정부 대동령 박은식 선생이 병마에 걸려 기세(棄世)하시니 석주선생이 국무령으로 추대 되시고 다음 해인 1926년 만주로 돌아오셨으나 소위 삼시(三矢) 조약이 장작림과 조선총독부간에 체결되어 만주 토인들까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므로 그 후로는 도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선생께써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남만주에서 북만추등지로 전전 옮겨 가면서 거의 지하적으로 활동하셨 습니다.
   이 무렵부터 재만동포의 생활조건도 지극히 악화되어 가던 중 일제무리의 음모로 한·중(韓·中) 인의 이간책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고 왜놈의 관동군이 9.18사건을 일으켜 만주를 정복하여 재만동포샤회가 크게 동요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왜놈들의 교활한 유혹을 물리치시고 고민하시다가 생애를 독립제단에 바치시니 일편단심 고절을 지키시다가 청사를 빛내고 전국으로 가셨으니 선생으로서는 무엇이 한이리까마는 살아 남은 후학들과 항상 동경하던 혈족들의 오장에 맺혀있는 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뭇다하고  남기신 홍업(鴻業)은 우리들이 관철하오리다. 님의 명복을 빌면서 읍소합니다.
            1990년(단기4323년) 10월11일 광복회장 이 강 훈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신 석주 이상룡 선생님을 비롯한 애국독립지사 4위의 유해를 봉환, 안장하는 이 엄숙한 식천에서 정부를 대표하여 몇마디 추모의 말씀을 삼가드립니다. 조국독립항쟁을 위해 고국을 떠나신지 79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운명하산지 58년만에 한줌의 흙이 되어 환국하신 석주 이상룡 선생님을 이곳 국립묘지에 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선 저희 후진들의 심정은 실로 착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국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 라는 통절한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으신 석주선생님께서 고국산천이 해방의 감격을 맞은지 벌써 45년이 지났건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역의 유택에서 고혼이 되어 쓸쓸히 계셨다는 사실앞에 저희는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오나 선생님께서는 이처럼 불민한 저희 후진들을 결코 책망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으로 국권을 되찾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건국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저희들은 비록 때늦은  일이옵니다만, 석주선생님의 환국을 계기로 하여 앞으로 국외에 계신 많은 순국 열위들의 봉환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갈 것임을 엄숙히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약소후진국의 처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당당한 국력을 갖춤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파란만장했던 민족 과거사를 돌이켜보며 수많은 광복지사, 열사들을 온 겨레의 가슴속에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석주선생님께서는 오로지 국권회복의 일념으로 조국독립전선에 평생을 바치셨고, 민증계옹과 민족교육으로부터 식산홍엽(植産興業')과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신 애국애족의 귀감이요 사표이셨습니다. 더구나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지사들 가운데서도 석주 이상룡선생님께서는 항상 시대를 앞서가신 독럼운동의 선구자이시면서, 분열되기 쉬운 독립전선을 화해, 조정시켜 단결된 힘을 모으고자 했던 고결한 인품을 지니신 분이옵기에 선생님에 대한 흠모의 정은 더 꿇어오르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일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1858년 경북 안동대가에서 태어나시어 일찌기 퇴계선생의 정통유학을 체득하심으로써, 유학자로서 그 명성이 자자하셨습니다.
   유교의 척사위정(斥邪衛正 정신을 바탕으로 을미참변 이후 10여년동안 의병 항쟁의 선두에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진력하셨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근대적 민중계몽과 민족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찾아 나서셨습니다.-(중 략) -선생님께서 걸어신 74년의 일생은 지공무사(至公無私)란 말 외에 어찌 달리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선생님의 유해는 말없이 환국하시어, 그토록 다시 밟아 보기를 염원하시던 조국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석주선생님께서 평생을 바쳐 추구하신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정의 이상은 선생님께서 수반으로 계셨던 임시정부의 뿌리를 이어받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활짝 꽃피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후진들은 선생님께서 남기신 자주와 민주의 정신은 자손만대 무궁토록 견지해 나갈 것이며, 민족익 완전한 광복인 통일을 기필코 이루어, 선생님의 멸사봉공(滅私奉公)에 만분지일이나마 보담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을 엄숙히 다짐하고자 합니다.
   석주선생님의 영령이시여, 선생님의 일생의 헌신과 희생이 바탕이 되어 오늘 저희들이 번영과 행복을 누리고 있사오니 부디 하감하시어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사랑하시던 이 겨레의 앞날을 지켜주시고 밝혀주시옵소서! 선생님의 영령이시여 “수많은 순국열위, 호국영령들과 함께 이곳에    서 편히 영면하시며 천상홍복을 누리옵소서”
                 1990년 10월 11일  국무총리 강 영 훈

13. 석추공과 함께 국내외에서 구국활동을 한 임청각 후손

(1) 이준형(李濬衡) 지사(1875~1942) (31세 참판공파)

   字는 문극(文極), 호는 동구(束邱)이며 석주공의 아들이시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협동학교 도동서숙, 동화학교, 보문의숙을 설립하여 교사로 재직하면서 산문학(新文學)을 보급시키다가 1911년 부친올 따라 만주로 망명했다가 자금 조달을 위하여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면서 남아있는 가산을 정리하여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또한 중국 동남성으로 건너가서 유하현 고산자에서 경학사의 설립을 도와 청소년 교육 및 군사양성에도 협력하였으며 서로군정서의 설립과 운영을
도왔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월곡면 도곡동에 있는 재실에 기거하면서 석주공의 유고를 정리 하셨으며 일제의 압박에 “하루를 더 사는 것이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란 유서와 유시를 남기고 범계정(帆溪亭)에서 통맥절단  자결하셨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고 대전국립묘지에 옮겨 안장하였다.

(2) 이병화(李炳華) 지사(1906~1952)(32세 참판공파)

  字는 경천(敬天), 호는 소파(小坡) 이시다. 조부이신 석주공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일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다가 청성진 주재소와 세관을 폭파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1928년 만주에 사는 한인청년동맹 및 농민동맹 사무집행위원으로 일하면서 반석현 모범학교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일본에 의해 만주국이 세워졌을I때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로 묘소를 옮겼다.

(3) 이상동(李相東) 지사(1865~1951) (29세 참판공파)

  초명은 용희이며, 字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석주공의 동생이시다. 1895년 형과 함께 의병장 신동석 휘하에서 투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1년 기독교를 신봉하여 장로가 되었으며 1919년 3.1운동때에 안동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표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출옥후에도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수차 구속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로 묘소를 옮겼다,

(4) 이봉희(李鳳羲) 지사(1868~1937) (30세 참판공파)

  字는 덕초(德初), 호는 척서(尺西)이다. 백씨인 석주공을 보좌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1911년 이후 대한협회가 해산되자 이듬해 백씨를 따라 남만주로 건너가서 1920년 임시정부 외교원으로 봉천에 주재하면서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요동의 농도개척 허가를 얻어 이주 동포들의 생계유지를 도모하여 만주에 산재한 농토개척사업에 전력하다가 하얼빈에서 서거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로 묘소를 옮겼다.

(5) 이운형(李運衡) 지사(1892~1972) (31세 참판공파)

  字는 중약(重若)이며 호는 백광(白光)이다. 석주공의 조카로서 백부의 밀명으 로 입국하여 파고다공원 3.1운동에 참가후 다시 망명하였다. 1918년 서로군정서 애국단체와 연결 활동중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4개윌간 옥고를 치루었다. 안창호의 지시로 한국인 관리 사직 권유서를 배포중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대구 계성학교 교목 및 교장을 역임한 후 미국 시카고에서 서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6) 이형국(李衡國) 지사(1883~1931) (31세 참판공파)

   字는시윤(時尹)이며 호는 창해(滄海)이고, 1913년 석주공의 조카로 박경 종, 이승화 등과 밀입국하여 신흥학교 군자금관계로 규합하여 비밀결사중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l년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후 비밀결사, 신흥사 활동 등으로 다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1927년 유인식, 송기식, 정현모 등과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교육부장에 취임하였다.
  198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와룡면 도곡리 수정산 공동묘지에 만장하였다.

(7) 이승화(李承和) 지사(1876~1938) (29세 참판공파)

   휘 찬(瓚)의 손자로 10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 1915년 석주곰의 밀명으로 귀국하여 군자금을 모집 활동중에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석주공과 함께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다가 길림성에서 서거하시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로 묘소를 옮겼다.

(8) 이광민(李光民) 지사(1895~1945) (31세 참판공파)

  字는 사익(士翼)이고 호는 자화(子華)이다, 휘 계동(啓東)의 아들로서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청년독립지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서로군정서의 정무에도 적극 활동하였고 만주 북안현 일대의 수로공사를 개발하여 동포들의 농사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흑룡강성 취원창에서 서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로 묘소틀 옮겼다.

(9) 이종영(李鍾韺) 지사(1886~1926) (28세 침판공파)

  字는 성달(聲逢)이고 광복단의 채기중 등과 교유하며 1913년에는 대한광복단에 참여하며 자택을 광복단의 병기 보관장소로 제공하고 밀회장소로 사용하였다. 1918년 귀가중에 체포되어 공주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1년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조국 독립에 뜻을 둔 청년들을 모집하여 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1926년 지병으로 서거하였으며, 1993년 8월15일 건국훈장에 추서되셨다.

(10) 이승복 (李承復) 지사(1885~1954) (29세 참판공파)

  字는 경양(景陽)이며 1917년부터 석주공에게 군자금을 동원하고, 서당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3월 안동에서 김영석, 김구현 등과 함께 독립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오후 5시경 안동장터에서 다시 시위군중들과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이튼 날 안동경찰서 앞 독립만세 시위대에 가담하여 행진하다가 5뭘10일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얼마후 서당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대전국립묘지로 묘소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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