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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해학공(海鶴公) 휘 기(沂, 1848~1909)(26세 둔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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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09 21:15 조회8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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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해학공(海鶴公) 휘 기(沂, 1848~1909)
                                            (26세 둔재공파)

                               
1. 해학공의 출생과 학문

  해학(海鶴) 公의 휘는 기(沂)요, 字는 백증(伯曾)이시고 해학은 그의 호이다. 질제(質齊), 신곡(辛谷), 효산자(曉山子) 등의 호를 쓰기도 하였다. 1848년(현종 14년)에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서 출생하셨다.
  해학공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총명, 7척 장신에 빛나는 안광(眼光,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과 쇄락(灑落, 마음이 상쾌하고 시원함)한 기상, 불의에 굽히지 않으며 스스로 영웅에 뒤지지 않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위압을 느끼게 하였다고 한다. 7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9세에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우다가 가세가 곤궁하여 서당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주가 뛰어난데다가 배우기를 좋아하던 그는 13세에 4서3경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公의 학문은 별다른 스승에게 배움이 없이 독학으로 자득한 것이었지만 준일창달(浚逸暢達, 재능이 뛰어나며 구김살 없이 자람)한 詩를 짓는 재주는 15세에 향시(鄕試, 각 도에서 관내 선비들에게 보이던 초시)에 나가면서부터 그의 재명(才名, 재주로 말미암아 소문난 이름)이 원근에 떨치게 되었다.
  해학공은 당시의 명분으로 알려진 영제 이건창(李建昌)과 매천 황현(黃炫), 석정 이정직(李定稷), 소금 왕사천(王師天), 소천 왕사찬(王師瓚) 형제 등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詩文에 있어서도 이들은 서로 백중지간 이었다. 영제 이건창이 쓴 질제기(質齊記)에서 보면 해학공의 문장은 비단결 같다고 하였으며, 이정직이 쓴 “해학시문 서(海鶴詩文 序)"에서는 “내 요사이 백증(伯曾)의 글 쓰는 것을 보면 더욱 변박기려(辯博奇麗, 변론이 밝고 학문이 뛰어나게 아름다움)하며 오직 뜻 가는대로 쓰되 범상치 아니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얼핏 보아도 놀라울 정도이며” 또한 “伯曾의 글에는 아름다운 빛을 풍기면서도 여기에는 욕염(慾厭)의 뜻이 없다”고 하였다. 해학공의 문장은 “허자한구(虛字閒句)가 마치 꽃부리와 같고 곡식의 알맹이와 같이 마음이 따뜻하고 바르고 아담하여 품위가 우아함이 당나라 시대 명문 유자후 (柳子厚)의 문맥이 완연하고 기교가 없는 것이 자신의 문장으로서는 미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남방의 웅문(雄文)인 황현과 백중으로 본다고 하였다.
  황현의 “제문 이해학(祭文 李海鶴)”에서 보면, “해학은 하늘이 낸 뛰어난 재목으로 웅매초려(雄邁超驪)한 기질에 혼기변박(魂奇辯博)한 문식(文識)을 가졌다. 그의 학문은 앉아서 담론할 것이면 곧 서서 행한다. 그의 뜻은 국왕을 높이면서 백성을 비호하는데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해학의 천품적인 기질과 문장, 학문, 사상의 발군(拔群, 크게 뛰어남)함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해학공의 문명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당시에 해학과 이정직, 황현은 호남의 삼재(三才)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특수한 재주를 가졌으면서 교분이 두터웠다. 이것은 다만 시문만의 교우가 아니었다. 저들은 학문의 방향이나 시국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상면에서까지 지기(志氣)가 통하는 지기(知己)의 벗이었다.
   해학공은 학문의 과정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서 전통적인 도학자들의 폐습을 절감하고 유학(儒學)이 공리적이며 고식적인 굴레를 벗고, 보다 실용적이면서 진취적인 실학으로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 전북지방에서는 한말의 대표적 유학자로 알려진 간재 전우(田愚)가 수천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해학공은 이들의 도학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도학이 남긴 공리(空理,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 형식(形式), 모화(慕華, 중국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 ·수구(守舊), 봉건적(封建的)이면서 시국을 알지 못하는 폐쇄주의로 당시와 같은 정치, 경제, 교육의 혼란을 야기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학공은 유학(儒學)이 진정한 유학으로서 광정구국(匡正救國, 국정을 바르게 하여 나라를 구하는 것)의 학문이 되려면 앞서 이 지방에서 반계 류형원(柳馨遠)과 김육(金堉), 다산 정약용(丁若鏞) 등이 개척하여 놓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나 진상을 탐구하는 일), 이용후생(利用厚生, 이용을 잘하여 살림의 부족함이 없도록 함)의 실학을 토대로 하여 현 시국에 부응하는 새로운 학문으로 전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해학공은 이 지역에 유정학풍(柳丁學風)의 뒤를 잇는 새로운  실학적 풍조를 일으켰던 것이니 그가 교유한 서울의 이건창(李建昌), 장지연(張志淵), 호남동향의 황현, 왕색금(王索琴), 왕사찬(王師瓚), 박환래(朴桓來), 박극유(朴克柔), 이정직, 최보열(崔輔烈), 정인기(鄭寅驥), 양백규(梁伯圭), 전남 나주의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영남의 최현달(崔鉉達) 등은 해학공과 더불어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뜻을 같이 한 동학(同學)들이었다.
  해학공은 당시의 정계가 족척(族戚)들의 이권다툼으로 인한 혼란이 날로 더해짐과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 따위를 가혹하게 거두어 못살게 들볶음)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지게 하였으며, 서구 종교와 신문화의 국내 유입으로 인한 쇄국과 개방의 두 논쟁 속에서 한낱 힘없는 농촌 유생이라고 해서 그대로 안연(晏然, 마음이 침착하고 편안함)하게 세상을 등지고 성리학이나 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배 실학자들의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의 상황을 면밀하게 탐구하였다. 혼란의 원인이 구명되면 이의 시정 광구책(匡救策,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흐트러진 세상을 구제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해학공 학문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과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첫째는 가세가 곤궁하여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하였으며, 둘째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고 지도를 해줄 사우동지(師友同志)를 얻는 일이었다.
  公이 나이 30살이 넘어서는 어려운 생활을 꾸리기에 관심을 두어야 했고, 34~5세부터는 생활 근거지를 구하여 김제, 대구, 순창 등지를 전전하기 10년, 44세에 친구 매천 황현의 주선에 따라 구례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학문과 세무(世務: 세상살이에서 해야할 온갖 일)에 뜻을 두게 되었다.

2.  해학유서(海鶴遺書) 발간

(1) 해학유서

  해학유서는 실사구시 목적으로 학풍쇄신, 정치, 경제면에서 시의에 따라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글들을 모아 1955년 11월1일 대한민국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최초로 발행한 것이다.
  발행된 해학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제1권에는 전제망언과 척량설, 제2권에는 급무팔제의(국제, 관제, 전선제, 지방제, 전제, 호역제, 잡역제, 학제), 제3권에는 노변(양기론, 가장고기론, 목패론, 삼도론, 양흑변, 자로변, 호남학보논설, 향교득천, 대학신민해, 학비, 학문, 교육종지, 일부벽파론, 자강회월보), 제4권에는 소주문론(논의소구진황지, 청육이소, 대근대상주봉서), 제5~6권에는 국내외 위정자, 친교자간의 서신교환 집록, 제7~8권에는 각종 서, 발문, 기문, 집록, 제9∼12권에는 전설, 잡서, 시, 부, 잡록 등이다.
  해학유서 212-1페이지 대한민국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신석호(申奭鎬)의 해설에 의하면 해학유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자 李沂선생의 유문으로서 그 큰아들 낙조(樂祖, 27세)와 제자 강동희가 공동으로 편찬하고 위당 정인보 선생이 교열한 원본에 의하여 출판했다고 적혀있다.
  김상기박사의 주선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3호로 발간되었다.

(2) 해학유서(海鶴遺書)를 펴면서

  본회는 작년도부터 희귀한 한국 사료(史料)를 출판하기 시작하여, 이미 그 제1로 매천야록(悔泉野錄), 제2로 기려수필(騎驢隨筆)을 출판하였거니와, 이제 제3으로 해학유서(海鶴遺書)를 출판하여, 학계에 이바지하려고 하는 바이다
  본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자 李沂선생의 문집으로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교열(校閱)한 것이다.
  李沂선생은 호남 김제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수 백년간 우리나라 유학계에 풍미(風靡)하던 성리학(性理學)을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로 하는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류형원과 다산 정약용을 조술(祖述, 선인의 본받아서 서술하여 밝힘)하여 전제연구(田制硏究)에 가장 힘을 기울였었다. 그것은 가난한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기울어져 가는 국세(國勢)를 회복함에는 토지개혁이 가장 긴급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었다.
  그러나 민씨 일당이 정권을 잡고 국가와 민족은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어지럽게 하며 지방관리가 또한 협잡을 일삼고, 백성을 착취하는 까닭에 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청, 일, 로 3국의 침략의 마수가 들어와 국세가 날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公은 애국운동 혁명운동에 몸을 던져,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났을 때, 민씨정권의 타도를 계획한 일이 있고, 노일전쟁 이후 노일 양국이「포츠머드」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할 때,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기 위하여 동지 몇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하다가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동경에 체재하면서 일본 황제와 일제 요인에게 강경한 항의문을 제출하였으며, 을사보호조약이 제결된 이후, 박제순(朴齊純) 등 5적(賊)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었다.
   公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몸소 여러 번 위험한 행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국권을 회복함에는 신교육이 제일이라 생각하고, 대한자강회지(大韓自强會誌)와 호남학보(湖南學報)에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여 크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한말의 큰 애국자요 선각자였었다.
  본서는 公이 연구한 토지제도와 기타 한말에 개혁하여야 할 여러 가지 제도 및 시국문제를 논한 상소문(上疏文), 항의문(抗議文), 논설(論說) 등을 수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근세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유족의 힘으로 이것을 출판하기 어려우므로 국비를 들여서 출판하게 된 것이거니와, 본서도 매천야록, 기려수필과 함께 학계에 큰 공헌이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는 바이다.
        단기 4288년 10월 일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문교부장관 李瑄根

(3) 해설

  본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자 李沂선생의 유문(遺文)으로서, 그 아들 낙조와 제자 강동희가 함께 편찬하고 위당 정인보 선생이 교열한 원본에 의하여 출판한 것이다.
  李沂선생은 선대로부터 전라북도 김제에 세거(世居)하였으며, 헌종14년(1848)에 출생하여 융희3년(1909)에 서거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그 이름이 원근에 높이 나타났으나, 그의 학문은 수백년간 우리나라 유학계에 풍미하던 성리학을 버리고, 실사구사와 이용후생을 주로 하는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류형원과 다산 정약용을 조술(祖述)하여 전제연구(田制硏究)에 가장 힘을 기울였었다. 그것은 가난한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기울어져 가는 국세를 회복함에는 토지개혁이 가장 긴급하다고 생각하였지 때문이었었다.
  그러나 당시 민씨 일당이 정권을 잡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정치를 어지럽게 하며, 지방관리가 또한 협잡을 일삼고 인민을 착취하는 까닭에 그의 이상을 실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청, 일, 로 3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마수가 들어와 국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민씨 일당의 간악한 정치가들을 제거하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항상 정부의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고종 31년 (1894)에 동학란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고부에 있는 동학당수 전봉준을 찾아가서 난군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민씨 일당을 타도하고 새로운 국헌을 제정하여 국세를 회복하자고 하였다. 전봉준은 이에 응락하였으나, 남원의 동학난을 지도하던 김개남이 거절하고, 도리어 公을 해하려고 하므로, 그는 도망하여 구례에 이르렀다. 이때 公은 구례에 살고 있었으며, 동학당이 구례에 침입하여 민재(民財)를 약탈하므로, 고을 사람 수백명을 거느리고 동학당 소탕에 진력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시국이 급변하여 정치를 어지럽게 하던 민씨 일당이 물러나고 입헌정치를 실시하게 되자, 서울에 올라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에게 전제개혁안을 제의하고, 을미사변 이후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이남규가 안동부 관찰사가 되어 영남 의병을 진압하려고 할 때, 그 막료가 되어 영남에 이르러 의병토벌군을 모집 훈련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였으며, 광무 3년(1899)에 국가에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전국의 토지를 측량할 때, 양지위원(量地委員)이 되어 충남 아산의 토지를 실측하였다.
  광무 9년(1905)에 노일전쟁이 끝나고, 노일 양국이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회의를 개최할 때, 公은 이 회의에서 반드시 한국에 관한 중대한 결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나인영 등 동지 수명과 함께 도미하여,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기 하고, 외무부에 여행권을 청구하였으나, 일본공사 엄권조의 방해로 얻지 못하고, 일본 동경에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에게 서면으로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논박하였다. 그러나 넘어져 가는 큰 집을 公 한 사람의 손으로 떠받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포츠머드 조약의 결과, 한일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갔다. 그 후 公은 할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동시에, 애국지사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민중의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무 11년에 나인영 등 동지 십 수인과 함께 을사오적(朴齊純, 李址鎔, 李根澤, 李完用, 權重顯)을 암살하기 위하여, 폭발물을 오적의 집에 선사하였으나,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다. 그 후 다시 오적을 총살하기 위하여 부서를 결정하고 각각 오적의 뒤를 따라 다녔으나, 다만 권증현(權重顯)을 경상시켰을 뿐으로 또한 성공하지 못하고, 동지 나인영(羅寅永)의 자수로 말미암아 모두 체포되어 진도에 귀양가게 되었다. 나중에 석방되어 서울에 돌아와, 호남학보를 발간하여 다시 계봉운동을 전개하다가 융회 3년(1909)에 63세를 일기로 서울 객창(客窓)에서 세상을 떠났다.
   公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몸소 여러 번 위험한 행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국권회복에는 신교육이 제일이라 하고, 당시 일반이 고집하던 서당과 한학을 버리고, 학교에 갈 것과 국문을 배울 것을 숙렬(熟烈)히 주장하였다. 그는 애국자인 동시에 선각자였던 것이다.
  본서는 12권 3책으로  성립되었다. 제1권 전제망언(田制妄言)에서 우리나라의 토지제도의 결함을 논하여 그 개혁하여야 할 점을 지적하고, 제2권에 국제(國制)·관제(官制)·전선제(銓選制)·지방제(地方制)·전제(田制)·호역제(戶役制)·잡세제(雜稅制)·학제(學制) 등 우리나라가 시급히 개혁하여야 할 여러 가지 제도의 방안을 설명하고, 제3권에는 논변(論辨), 제4권에 소주문(疏奏文), 제5,6권에 서간문(書簡文), 제7권에 서(序), 제8권에 기(記), 제9권에 전(傳)·잡저(雜著), 제10권에 부(賦), 제11권 이하는 시(詩)를 수록하였다. 전체의 문장이 미려하고, 논지(論旨)가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것으로서, 보통 문집과 예를 달리하여 한말의 정치·경제·문화·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여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김상기(金庠基)씨로부터 본서를 구하여 귀중한 문헌임을 인지하고 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권3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며, 위당 정인보선생이 교정한 것을 조금도 변경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출판하였다. 단 공무 다망하여 해학선생의 후손을 찾아보지 못하고, 위당선생이 쓴 해학선생묘지명(海鶴先生墓誌銘)과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여 선생을 소개하는 이 후기(後記)를 쓰게 되어 혹은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바이다. 이 점을 깊이 그 후손에게 사과하는 바이다.
                     단기 4288년 10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申奭鎬

3.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 추서(追敍)

      해학 이기선생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
               建國勳章證  故 李 沂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조국 광복에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하므로 대한민국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에 의하여 이에 건국 훈장 국민장을 추서함
      1968년 3월 1일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이 증을 제460호로서 건국훈장 국민장부에 기입함   총무처장관 이석제

※ 우리나라 상훈법시행령 부칙(90.7.3 대령13040)
② (이미 수여된 훈장에 관한 경과조치) 이 령 시행 전에 수여된 건국훈장      국민장은 이 영에 의한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본다라고 명기 되어 있다.

4. 국립묘지 안장(安葬)

1957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서울 동작동 소재 국립묘지(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하였다(묘번 159호)


                          〈비석후면 비문)
   전북 김제인으로 1906년 장지연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매국 오적 독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1907년 7년 유배형을 받았고 1909년 3월25일 향년
   63세로 영면하시다.
         1968년 3월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추서.
                  배위 최월봉 합장.


5. 구국운동 추념비(追念碑) 건립

(1)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위 원 장   문동리(전북신문사장)      
 명예위원장 조철권(전부지사)
 위 원  채유석(KBS전주방송국장)     최규철(전주문화방송사장) 
        이현종(국사편찬위원장)       김삼룡(원광대학교부총장) 
        이강오(전북학교교수)         최근무(전주교육대학교수)   
        이치백(전북신문사주필)       이중각(이리여고교장)   
        송창진(새마을운동전북지회장) 금종오(국제로타리367지구총재)
        정진형(김제문화원장)        장명규(국제라이온스318-B지구총재)
        노환(강복회전북지부장)       이공빈(군산공안과의원장) 
        노인병(전북지구JC회장)       최판호(만경향교)
        이세환(종친대표)

(2) 해학 李沂선생 구국운동 추념비(追念碑) 비문

  여기 나라와 겨레사랑의 위대한 선각자 李沂선생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새겨 길이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자 백증(伯曾), 호 해학(海鶴), 본관은 고성으로 1848년 전북 김제에서 나시었다. 일찍이 학문의 바탕을 실학에 두어 당시 정사의 혼란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아 지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오로지 바치고자 하시었다. 그 지름길은 선진한 새 문물의 섭취로 겨레생활의 과학화를 꾀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 선생은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를 통하여 시급히 개혁해야 할 여러 제도상의 방안을 주장하셨고 한때는 직접 측량과 세정(稅政)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침략행위가 날로 들어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일황과 정계요인에게 그들의 침략과 배신행위 부당성을 따져 크게 꾸짖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끝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분과 실망을 후진 양성과 구국정론을 펼쳐 나가는 일로 돌리셨다.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을 맡으신 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무리들을 처단하고 국권을 굳게하여 달라는 상소문을 올리는 한편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직접 제거하려다 진도까지 귀양 가셨던 일, 귀양에서 풀려셔서도 호남학보(湖南學報) 등에 정부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국정론을 펼치셨던 일,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와 한글사용을 주장하여 주체의식을 복돋우고자 하신 일 등이 모두 나라와 겨레 사랑의 투철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침략이 극에 이르자 선생은 서울 여사(旅舍)에서 단식절사(斷食節死)하셨다. 이러한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선각자이신 역사적 위인을 우리 고장에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전북도민의 끝없는 영예 일뿐 아니라 우리 향토의 크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우러러 선생의 높으신 뜻을 다시 여기에 되새긴다.
  되돌아볼 때 선생의 빛나는 생애와 의로운 넋은 조국광복으로 이어졌거니와 겨래의 무궁한 앞날을 두고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이어져야 한다.
                  1983년 후학 문학박사 김상기 짓고  여산 송성용 쓰다

6. 선현(先賢) 10인 선정

  1971년 전북일보사에서 “자랑스런 전북인 되기” 운동을 전개하여 1973년도에 선현 10인 기념사업회에서 해학 李沂선생을 포함하여 선현 10인이 선정되었고 1971~1981년까지 전북일보사와 전북대학교 비사벌(比斯伐)에 전북대학교 이강오 교수와 전북일보사 백남혁 논설위원으로부터 해학 李沂생선의 “구국사상”과 “유학에서 실학으로“ 등 해학 선생에 대한 글이 수십 차례 게재된 바 있다.

7. 해학 李沂선생 사적(史籍) 진도역사관 전시

(1) 진도방문

  2003년 8월10일 대구에서 둔재공파 총회시 진도군에서 해학 李沂선생의 유품을 찾아 역사관에 전시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2003년 8월23일(토) 진도군청, 진도향토문화회관, 진도문화원, 진도역사관 신축현장 등을 방문하게 되었다.

(2) 해학 李沂선생 이름 오류발견 시정요구

   진도군 문화관광과를 방문하여 방문취지를 설명하고 진도군과 국립목포대학에서 공동으로 발행한 진도군의 문화유적책자(목포대학 학술총서 제7책) 제5편 총람 제1장 인물의 유배자 편 247페이지에 해학 李沂선생의 생애 및 사적이 기술되어 있었으나 인명란에 한문으로 李沂, 한글로 이기가 아닌 이소로 표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진도군문화관광과 박송수, 진도향토문화회관 윤진호 관장과 김영진 관리계장에게 정정 요구하였다.

(3) 자료제출

  문화관광과에 해학 李沂선생의 건국훈장증 사진 l매, 국립묘지 159호 전경, 묘지 전경, 비석 전후면 비문 사진 l매, 해학 李沂선생 구국운동 추념비의 정면사진, 전면 문안 사진, 후면 사진, 후면 문안 사진, 측면 사진, 전경 사진 각 1매씩을 제출하였다.

(4) 진도역사관 개관 참석
 
   2003년 10윌31일(금) 진도역사관 개관식에 참석하였으며 해학 선생의 관련 도서인 해학 李沂선생(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건립위원회 발행 p64), 해학유서(한국사료총서 제3, 국사편찬위원회발행 p217), 호남학보 해학 李沂선생 모음집 책 (1~9호, p603) 각 1권씌을 전달하였다.

8. 해학 李沂선생에 관련된 연구논문 상황

(1) 전북인물지(全北人物誌)(상권)에 전북대학교 이강오교수가 항일구국의 실     학자 해학 李沂에 대하여 논문을 써서 사단법인전북애향운동본부가 발행
(2) 동방학지(東方學誌)(제31집, 1982년 6월)에 연세대학교 김도형 교수가      해학 李沂의 정치사상연구에 대하여 논문을 써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에서 발행.
(3) 원광사학(圓光史學)(제2집 1982년 12월)에 원광대학교 나종우 교수가       해학 李沂의 구국운동과 사상에 대하여 논문을 써서 원광사학에서 발행
(4) 노령(蘆嶺)(1981년 12월호)에 전주문화방송사 송영상 심의위원이 애국       지사 李沂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하여 전주문회원에서 발행
(5) 연세대학교 김용섭 교수가 한국근대농업사 연구에 대하여 써서 일조각에       서 발행,
(6) 아세아학보(제1집)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김상기 박사가 “해학 李       沂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하성 이선근 박사 화갑기념논총에 수록        발간.

9. 국사대시전에 수록된 “애국지사 해학 李沂”

  이홍직 박사가 저술한 국사대사전에 수록된 해학 李沂(1848~1909, 헌종 14년∼융희 3년) 선생은 구한밀의 애국지사, 字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 본관은 고성,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되 수백 년간 우리나라 유학계(儒學界)를 지배해온 성리학(性理學)을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後生)을 주로 하는 실학을 연구하여 류성원, 정약용 등의 학통을 이이받았다. 조선말 민씨일당의 부패정치를 증오하던 터에 1894년(고종 31) 동학란이 일어나자 고부의 동학당수 전봉준 (全棒準)을 찾아가 당군(黨軍)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일당을 타도하고 나라를 바로 잡자고 권하여 합의를 보았으나 남원지방의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이 반대하여 뜻을 못 이루고 구례 자택으로 돌아갔다.
   이때 동학군이 구례에도 침입하여 민가의 재산을 약탈하니 고을사람 수백명을 이끌고 통학군의 횡포를 막았다. 1899년(광무 3)에는 정부에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전국의 토지를 측량할 때 양지위원이 되어 충남 아산의 토지를 직접 측량한 바도 있으며 1905년(광무 9) 노일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포스마우스‘ 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 나인영(羅寅永) 등과 도미하여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본공사 하야시의 방해로 여권을 얻지 못하고 일본 도꾜로 건너가 일본황제와 정계요인들에께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해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니 할 수없이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 교관이 되어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장지연(張志淵)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희(太韓自疆會)를 조직하는 등 민중계몽에 헌신했다.
   1907년(광무 11) 나인영 등 동지 10여명과 모의하여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암살하기로 하였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성공하지 못하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간하면서 계속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종사하다가 63세를 일기로 서울 객창에서 절식자진(絶食自盡) 하였다.

10. 맺는 말

   아무리 훌륭한 조상의 업적이나 문화유산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어받고 끊임없이 전승 개발해나가는 작업이 없고서는 만발했던 정신적인 유산, 문화적인 꽃향기도 잃기 마련이다고 감히 강조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 후손들이 목포대학과 진도군이 공동 발행한 진도군의 문화유적 책자의 인명란에 해학 이소라고 표기된 것을 이기로 바로 잡은 것은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좀더 자랑스런 고성이씨 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훌륭한 조상들이 남긴 업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도 후손들의 부단한 노력 없이는 빛 바랜다고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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