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의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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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위인

29세 효자 휘 영열(永烈)(1901~1985, 병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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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23 00:46 조회4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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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참의(贈參議) 상우당(尙愚堂) 국배(國培)의 현손(玄孫) 종율(種律)의 아들이다. 자는 수영(守永)으로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하였고, 성품(性品)이 부지런하고 검소(儉素)했으며, 농사(農事)에도 부지런히 힘써 살림을 잘 꾸려서 부모(父母)님을 잘 봉양(奉養)하였다.
 
30세에 이르러 50세된 어머니의 목뒤 머리발치에 종기(腫氣)가 나서 치료가 잘되지 않아 고생 중 의원이 말하기를,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야 치료할 수 있다.” 라고 함으로, 효자가 100 여일 지극정성으로 고름을 빨아내자, 종기가 완치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20 수년의 수명을 더 누리었다.
 
1934년 아버지가 등창(背瘡)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매일 입으로 종기를 빨아내면서 지극정성으로 간병(看病)했으나 차도가 없어, 진주(晉州)에 있는 영국병원(英國病院·훗날 도립병원)에 입원 수술(手術)을 받았다. 병원장(病院長)이 말하기를,
“병이 불치(膏肓)에 있어 약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의 살을 얻어 이식수술(移植手術)을 하면 혹은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효자는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하고, 자신의 대퇴부(大腿部) 3곳에서 700g의 살을 떼 내어 수술을 마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종기와 아들의 상처가 동시에 완치(完治)되었다. 아버지는 6년 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자는 3년을 하루같이 아버지 산소에 여막(廬幕)을 지키며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1943년 가을 원근주민(遠近住民)이 효자상(孝子賞)을 주고, 음식을 마련 잔치를 베풀고, 효자를 표창(表彰)하였다. 이처럼 지극한 효행(孝行)이 널리 알려져, 천주교 성공회(聖公會)에서는 효행사실을 밝히는「천양문(闡揚文)」이 배포되고, 이웃 정씨(鄭氏)문중과 유씨(劉氏)문중에서는 이와 같은 효행사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사천유림(泗川儒林)에 알리고, 일면 모금(募金)하는 한편 일본(日本)거주 동생 선열(先烈)에게 연락하여,
1945년 3월 삭녕(朔寧) 최연국(崔演國)은 비문을 짓고, 의천(儗川) 박헌기(朴憲琦)의 글씨로 사천읍 두량2동 뱀등산록 대로변(大路邊)에 「효자이영열기적비(孝子李永烈記蹟碑)」가 세워졌다. 비명(碑銘)에 이르기를,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을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함으로서
효도를 이루었네
어렸을 때 젖을 빨면서 어머니의 은혜를 느꼈고
커서는 종기를 빨아서 자식 된 직분을 다하였으니
진정 큰 효자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후 효자는 상처의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이웃의 보살핌과 존경으로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1985년 2월 수 86세로 졸했다.
 
아들 성규(性奎) 딸 최무경(崔茂卿)
규범(圭凡) 김채열(金採烈)
삼도(三道) 김오남(金五男)
대상(大相)
참고문헌
효자기적비명
경남신문 기사(1982. 1. 26)
고성이씨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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