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의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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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자동공(紫東公) 휘 正模(1846~1875)(은암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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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06 11:16 조회2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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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 휘는 정모(正模)이고, 자는 성양(聖養)이다. 호는 유천(柳川) 또는 자동(紫東)이라 한다. 은암공의 17대손으로 1846년 헌종 12년에 경상남도 의령군 석곡리에서 탄생하여 고종 11년인 1875년에 졸(卒)하시니 향년 30세에 불과하였다.
  학문의 길은 깊고 긴 것이므로 결코 짧은 생으로 이루기는 매우 힘든 여정이다. 그러나 공은 문명이 대진(大震)하고 유고가 발간되었으니 그 인품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공은 기예가 청수하고 양안이 광채가 나며 말을 입밖에도 내지 못하는 듯하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면서 흉중에는 굳은 지조를 가지고 그 자태는 서린채봉(瑞麟采鳳)과 같았다고 한다. 재조(才調)는 신귀조감(神龜照鑑)으로 가위(可謂)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어릴 적에 다른 학동들이 글 배우는 것을 옆에서 듣고 모조리 외었다고 한다. 특히 추구(推句)의 여섯 째 장에 나오는 “학은 먼 하늘가에 춤추고, 용은 큰 바다 가운데서 날아오른다. 즉 鶴舞長天外(학무장천외) 龍飛大海中(용비대해중)”을 즐겨 외우며 희색이 만면해 하였다.
  연치 여섯에 학문에 입문하여 곧 문리가 통하여 아버지가 제목을 내니 작문을 하였다. 여덟살 무렵에 다른 사람의 글을 평할 줄 알고, 아홉에는 의문이 나는 구절은 공의 고모부인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에게 질문하고 수학하였는데 문장과 식견이 탁월해져 인근 지역까지 명성이 자자하였다. 열 살 때에는 진주 영장의 백일장에 나가 감사 앞에서 명구를 작시하니 감사가 크게 기이하게 여겨 장원으로 뽑으니 이로부터 재명을 떨쳤다.
  성장하여 고모부를 따라 단계 권씨 가에 간 일이 있는데 책상에 안동의 거유인 대산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집요(大山輯要)가 있으며, 꿇어 앉고서 한번에 빠짐없이 외웠다고 한다.
  1866년(고종 3)에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문을 듣고 의령에서 경상북도 성주로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다음 해인 1867년(고종 4) 22세 때에 자미산(紫微山) 아래 도당곡(陶唐谷)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자도재(紫陶齋)’라고 이름을 지어 수양에 뜻을 두었다.
  1874년(고종 11) 29세 때 여름 금산(金山) 동당시(東堂試)에 참가하였다. 시관이 그를 도장원으로 뽑으려고 성명 문건을 요구하였는데 문건을 주고 장원으로 뽑힌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응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해 겨울 서울에 갔으나 시대의 변화를 보고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경학에만 전념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을 비롯하여 허유(許愈)‧윤주하(尹胄夏)‧김진호(金鎭祜)‧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이두훈(李斗勳) 등과 함께 주문팔현(洲門八賢: 퇴계의 학통에 연원을 두고 그의 학설을 심화시킨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로 『자동선생문집(紫東先生文集)』 6권 3책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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